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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조건 (동북아역사재단)
저널정보
숭실사학회 숭실사학 숭실사학 제44호
발행연도
2020.1
수록면
119 - 140 (22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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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의 패색이 짙어가던 1943년 5월 평양에 제30사단을 신설하였다. 이른바 평양사단으로 불리던 제30사단은 경성의 제20사단, 나남의 제19사단과 더불어 식민지 조선에 상주(常駐)하게 되었다. 즉 제30사단은 전쟁 말기 한반도 방어를 위해 급조되었던 여타 사단과 달리 평안도를 중심으로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을 수행하는 상주사단의 위상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제30사단은 애초 제19사단 소속이었던 제74연대와 제20사단 예하의 제77연대, 그리고 일본 후쿠야마 주둔 제41연대를 기간으로 성립되었다. 위수지역은 평안도 일대였으며 사령부는 평양이었다. 다만, 창설된 지 1년만인 1944년 5월 필리핀 전선으로 주력부대가 이동하면서 상주사단으로서 위수지역 내에 온전히 주둔한 기간은 길기 않았다. 그럼에도 ‘평양사단’의 설치와 주둔은 몇 가지 점에서 주목된다. 첫째, 한반도를 삼분해서 군사 지배하려는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제30사단의 창설 목적이 한반도 지배에만 있었다고 할 수는 없으나 조선 주둔 일본군의 상주화가 완료되는 1921년 이래 20년에 넘게 유지되던 상주 2개 사단 체제가 변모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는 자못 크다. 둘째, 식민지 조선의 군사적 위상과 역할 변화를 파악할 수 있다. 제30사단이 평양을 중심으로 주둔하게 된 것은 다분히 중일전쟁에 대비한 것으로 판단된다. 제20사단이 창설 이래 조선 내 치안을 중점에 두었다면, 제19사단은 소련과 전쟁에 대비한 군대라는 측면이 강했다. 이와 함께 중일전쟁 직후 중국에 대한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부대가 필요했던 것이다. 셋째, 제30사단에 대한 연구는 조선인 군사 동원과 피해를 조명하는 데도 도움을 준다. 제30사단은 조선에 주둔했던 기존의 보병연대를 기간으로 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 보병연대에 애초 동원되어 있었던 조선인 청년들이 그대로 제30사단에 배치되게 된다. 또한 1944년 1월 입영한 학도지원병 역시 적지 않은 수가 평양사단에 배치되었다. 즉, 조선인 군사동원을 규명하는데 제30사단의 주둔과 편제, 활동 등을 파악하는 일이 요구되는 것이다. 넷째, 현재 북한 평양시 일대에는 제30사단의 주둔을 위해 건설되었던 군사유적이 다수 남아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국내에 남아 있는 당시 도면과 항공사진 등을 통해 그 실체가 파악되고 있는데 향후 북한과의 교류를 통해 현장을 실사하고 그 역사적 의미를 부각하여 일제의 한반도 침략과 지배를 매개로 한 남북 공동 연구가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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