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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저자정보
조건 (동국대학교)
저널정보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한국독립운동사연구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51집
발행연도
2015.8
수록면
217 - 255 (39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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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1938년 4월부터 1945년 패전에 이르기까지 韓人들을 군인으로 강제동원 했다. 지금까지 일제의 한인 병력동원에 관해서는 동원 제도나 조직, 그리고 일부 지역의 사례가 연구되어 왔다. 그러나 정작 조선 내에서 병력동원을 직접 수행했던 조선 주둔군 내 동원 실태와 그 성격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밝혀진 바가 없었다. 이글은 駐韓 일본군 예하 常駐 제19사단과 제20사단을 대상으로 한인들의 部隊別·役種別·地域別 동원 양상과 그에 따른 특징을 고찰하였다.
조선에 주둔했던 일본군은 주둔 형태 및 편제에 따라 크게 駐箚軍·常駐軍·方面軍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주목할 점은 주둔 형태의 변화에 따라 병력 동원 체제 및 양상이 달라졌다는 사실이다. 즉 일본 본토의 사단병력이 1~2년을 주기로 교차 파견되던 주차군 시기와는 달리 상주군 시기에는 예하 부대의 소요 병력을 자체적으로 충당해야 했다. 다만 식민지 조선 내에는 필요한 병력 자원을 충당할 수 없었으므로, 일본 혼슈(本州) 중앙을 기점으로 동쪽 지역의 師管區에서 제19사단, 서쪽 지역에서는 제20사단 병력을 충원토록 설정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한인 동원이 시작된 1938년 4월 이후 각지에 병력동원 업무를 담당할 陸軍兵事部가 설치되었다. 1939년에는 경성·평양·대구·광주·나남·함흥 등 여섯 곳에, 1943년에는 각도에 각 1개소의 병사부를 두어 모두 13개소의 육군병사부가 만들어져 있었다. 각도에 1개소의 병사부를 설치한 것은 일본의 ‘1縣 聯隊區’제를 모방한 것이었다. 그러나 衛戍地域과 徵集區域이 일치했던 일본과는 달리 조선에서는 각도의 병사부가 ‘朝鮮軍司令部’에 하나로 예속되어 징집 및 배치가 일원화되어 있었다.
일본이 1938년 이후 군인으로 동원한 한인의 규모는 분명히 확인되는 인원만 11만여 명에 달한다. 특히 조선에 주둔했던 상주 제19사단과 제20사단 예하에는 1945년 현재 각각 1,888명과 1,901명의 한인이 배속되어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이들은 징집년도와 역종별로 몇 가지 특징을 보인다. 첫째, 각 사단의 전선 이동에 따라 한인들의 징집년도별 구성이 변화했다. 둘째 시간이 지날수록 현역병 비중이 높아졌다. 셋째 20사단 보다 19사단에 더 많은 현역병이 배치되어 있었으며, 이에 따라 20사단에는 19사단에 비해 예비역 비중이 높았다.
또한 제19사단에 동원되었던 한인 중 49.8%인 941명, 제20사단에서는 84%인 1,592명이 사망했을 정도로 일제의 병력동원으로 인한 피해는 극심했다.

목차

1. 머리말
2. 조선 주둔 일본군의 병력동원 조직과 구조 변화
3. 상주사단 내 한인 동원 양상
4. 한인 병력동원의 특징
5.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요약
영문요약

참고문헌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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