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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저자정보
우에다 기헤이나리치카 (日本 學習院大學)
저널정보
고구려발해학회 고구려발해연구 高句麗渤海硏究 第64輯
발행연도
2019.7
수록면
229 - 259 (31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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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7세기 후반 동아시아사 연구 분야에 있어 유민사는 매우 발전하고 있다. 기왕의 연구를 바라보면 주요 논점은 유민의 정체성, 백제 · 고구려의 제도사 · 사회사였다. 이러한 연구는 유민 제1세대 즉 초기 유민 묘지명에 대해서만 검토하는 경향이 있어, 무주시기 · 개원기의 제2세대 이후의 유민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된 바가 없다.
무주시기부터 현종대에 이르기 까지 유민 위상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한데도 불구하고 연구 자체가 부족한 상황이다. 연구 현황이 이러한지라 중요한 역사적 사건임에도, 개원 13년에 거행된 泰山 封禪祭에 있어 ‘百濟帶方王’과 ‘高麗朝鮮王’으로 칭한 백제 유민과 고구려 유민의 왕족으로 추측되는 인물들이 ‘內臣之番’으로 참석하였다는 사실조자 잘 알려지지 않고 그 역사적 의미는 불분명하다.
본 논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검토를 하고자 한다. 개원 연간의 봉선제에 백제 · 고구려 유민들이 참석한 이유를 밝히기 위해서 傳世文獻과 묘지명을 통해 무주시기에서부터 개원 연간에 이르기 까지 유민의 처우, 특히당 長安, 洛陽에 거주한 옛 왕족과 유력 가문의 동향을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그 결론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무주시기의 유민들은 당시 권력자와 밀접한 관계를 만들어 놓고 그 세력을 유지해 왔다. 즉 이 시기 유민들은 여전히 활발하게 활동을 벌였던 것이다. 둘째로, 개원기의 유민들은 그 세대교체가 진행되어 그 존재 양태가 변화하였다. 이후 옛 왕족이나 천 씨 등 유력한 가문들이 쇠퇴하여 이 시기부터 새로운 유형의 유민들이 등장했다. 셋째로, 개원 13년의 봉선제에서 옛 왕족을 각기 ‘百濟 帶方王’, 그리고 ‘高麗 朝鮮王’으로 처우했던 것은 앞선 시기부터 성행해진 신라 · 발해 등 東方 세력에 대한 견제 전략의 일환이었다. 넷째로, 봉선제에서 유민을 신라와 발해에 對峙시킨다는 당의 정책은 이후 신라 · 당 관계, 그리고 발해 · 당 관계에 영향이 미친 가능성을 제기했다.

목차

〈국문초록〉
Ⅰ.머리말
Ⅱ. 武周 정권과의 관계
Ⅲ. 開元期에서의 활동과 봉선제
Ⅳ.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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