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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조법종 (우석대)
저널정보
한국고대사학회 한국고대사연구 한국고대사연구 78
발행연도
2015.6
수록면
97 - 138 (42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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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후기 거점지역인 金馬渚 즉, 현재의 익산지역은 고구려유민이 고구려부흥전쟁을 진행하는 중심 거점으로 자리한 지역이다. 보덕국의 출발은 고구려 부흥운동과 羅唐 전쟁 및 신라의 고구려, 백제유민 통제정책의 전개과정에서 탄생한 고도의 정치적 산물이었다. 670년 문무왕에 의해 금마저지역으로 고구려유민이 옮겨지고 684년 반란을 일으킨후 신문왕에 의해 토벌된 15년의 기간동안 고구려유민들은 고구려부흥의 꿈을 이루기 위해 많은 노력을 경주하였다.
신라입장에서 백제의 금마저지역은 무열왕의 죽음을 암시한 水變爲血 현상의 공간으로 이후 백제부흥군과의 갈등양상을 고려하면 모종의 사건이 발생하였을 가능성이 높은 공간으로 이 지역에 대한 새로운 통제책이 필요하였다고 생각된다. 그 결과 고구려유민의 사민과 보덕국설치를 통한 백제유민, 고구려유민 통제의 효과를 극대화하고자 하였다. 또한 금마저지역은 명칭에서 나타나고 있듯이 금강, 만경강과 바다 및 산으로 둘러싸인 공간으로 주변 외부세력의 도움없이는 공간적 확장이 곤란한 공간이었다. 이같은 지역적 특성을 감안해 신라는 고구려유민을 이곳에 배치시켰다.
한편 고구려유민들은 신라 신문왕의 보덕국해체기도에 대항하여 684년 겨울에 반란을 일으켰는 데 그 공간은 현재의 왕궁리유적 공간과 보덕성으로 알려진 익산 토성 등 주변 공간을 활용하였다고 파악된다. 또한, 685년 3월에 완산주와 남원소경이 설치된 것을 감안할 때 3~4개월에 걸친 반란은 신라의 강력한 토벌로 붕괴되고 이후 보덕국민들은 남쪽 州郡으로 사민되었다. 관련 기록에 나타난 공간으로 남원 지리산의 옥보고 관련공간 및 전주의 고구려승려 보덕관련 지역 및 금마지역까지 관련 인물들이 확인된다. 결국 고구려유민들은 현재의 전라북도를 중심으로 분산 배치되어 신라사회에 편입되어 갔으며 그 문화적 영향성은 고려, 조선초기까지 흔적을 남긴 것으로 파악된다.

목차

국문초록
I. 서언
II. 백제후기 거점 金馬渚의 성격
III. 報德國 관련 공간 검토
IV. 보덕국의 양상과 변화
V. 결론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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