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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조인성 (경희대학교)
저널정보
신라사학회 신라사학보 신라사학보 제42호
발행연도
2018.4
수록면
1 - 31 (31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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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지배층은 백제와 고구려를 무너뜨리고 그 영토와 주민들을 차지하였음을 크게 자부하였다. 사실 그 역사적 의미는 적지 않다. 전쟁이 종식되었고, 평화가 왔다. 삼국의 문화가 융합되고, 주민들이 통합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그런데 그들은 왕경 중심주의를 고수하였다. 왕경인의 이익을 위해 고안된 골품제의 본질도 변하지 않았다. 따라서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들을 포섭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옛 백제의 지배층 상당수는 일반 백성이 되었다. 일부는 신라의 관등을 수여받아 신라의 지배층이 되었다. 그들 중에는 왕경인이 되어 골품을 갖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옛 지위에 현격히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들과 그 자손들의 정치적 출세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아예 신라의 관등을 거부하고, 백제의 관등을 내세우는 자들도 있었다. 이들의 불만은 옛 백제 지역을 중심으로 지속되었다.
옛 백제 지역에서는 백제의 전통이 계승되었다. 경덕왕 때 백제 이래의 지명을 중국식으로 바꾸었으나, 혜공왕 이후 다시 사용되었다. 백제 지명의 개명과 부활은 주민들로 하여금 백제 유민의 후손이라는 점을 되살리게 하였을 것이다. 백제 이래의, 그리고 백제 풍의 음악이 전승되었다. 사경과 관련한 기술도 백제의 전통을 잇는 것이었다고 여겨진다. 진표는 이 지상에 이상세계를 건설하려고 하였는데, 미륵불이 하생한 이상세계의 실현을 형상화한 미륵사의 그것과 통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옛 백제 지역 주민들의 불만, 백제 유민의 후손이라는 인식은 신라 정부에 대한 반감으로 연결되기도 하였다. 822년 김헌창은 옛 백제의 정치적 중심지이자 부흥운동의 본거지였던 웅천주에서 새로운 국가 건설을 선언하였다. 신라 말에는 옛 백제의 후예임을 자처하는 집단들이 출현하였다. 이는 옛 백제 지역 주민들의 백제 유민 의식을 배경으로 하는 것이었다고 여겨진다. 견훤은 900년, 신라 효공왕 4년에 완산주에서 백제의 건국을 선언하였다. 백제 유민 의식을 이용하여 천년 신라에 맞서려고 하였던 것이다.

목차

【국문초록】
Ⅰ. ‘일통삼한’의 이면
Ⅱ. 백제 지배층의 향배
Ⅲ. 백제 전통의 계승
Ⅳ. 후백제의 성립
Ⅴ.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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