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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최호원 (고려대학교)
저널정보
신라사학회 신라사학보 신라사학보 제49호
발행연도
2020.8
수록면
171 - 206 (3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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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멸망한 뒤 신라는 본래의 목표인 백제 故地를 차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 신라와 당 사이의 갈등은 심화되어 갔다. 신라는 670년 상반기까지는 고구려 유민세력을 진압하려는 입장이었으나, 7월경에 이러한 방침은 바뀌게 되었다. 그 계기는 웅진도독부측의 불온한 움직임 및 영토 획정에서 나타난 당의 압력이었다.
검모잠 등 유민세력은 안승을 왕으로 한 한성 고구려를 세운 뒤 신라에 인정을 요청하였으며, 신라는 670년 8월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책봉하였다. 여기에는 유민측에서 온 책봉 요청을 받아들임으로써 그들의 공격 가능성을 차단하고자 한 신라측의 의도, 고구려에 대한 신라의 원한이 백제보다 적었던 점 등이 작용하였다. 그리고 유민세력은 도움을 청할 만한 세력이 없던 당시의 상황과 보장왕대 대신라정책에 대한 일면의 반성, 책봉 요청을 함으로써 신라의 공격으로부터 자신들을 지키려는 의도 등이 작용하여 신라에 도움을 청하게 되었다.
그러나 유민세력 지도부 내에서는 고구려 부흥에 대한 인식에 차이가 있었다. 안승이 고구려 국가 자체의 부흥보다 유민들을 존속시키는 데 중점을 두었다면, 검모잠은 안승에 비해 한성 고구려를 유지하려는 의지가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한성 고구려의 실권자였던 검모잠에 대한 안승의 불만도 작용하고 있었으며, 고연무는 이러한 안승의 조력자였다. 마침내 당군과의 전투와 한성 고구려의 유지를 놓고 생긴 전략적인 시각 차이는 검모잠의 죽음을 초래하였고, 673년 윤5월의 호로하 전투를 계기로 한성 고구려는 사실상 소멸하였다.
안승은 신라로 간 이후인 674년 보덕왕에 봉해졌고 이후 신라에 대한 예속도가 점점 강화되어 갔다. 그러나 유민 세력 내에는 684년 대문 등 보덕국 잔여 무리의 반란이 말해주듯 안승과 다른 생각을 지닌 이들도 잔존하였다. 결국 신라는 684년의 반란을 평정한 이후에야 고구려 유민들에 대한 완전한 통제를 할 수 있었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668~670년까지 신라와 고구려 유민세력의 동향
Ⅲ. 670년대 고구려 부흥운동의 전개와 신라
Ⅳ.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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