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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전연구학회 韓國古典硏究 韓國古典硏究 제49호
발행연도
2020.1
수록면
5 - 31 (27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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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명 유민에 대한 조선 지식인의 기록과 유민의 후손이 기록한 것을 통해 명 유민의 재현 양상, 명 유민에 대한 조선사회의 태도를 살펴본 것이다. 조선초기부터 일본을 비롯해 외국에서 귀화한 이민자의 숫자가 적지 않았으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 명에서 온 이민자들이 급격히 늘어났다. 이들은 대부분 임진왜란 때 명나라 원군으로 조선에 온 장병의 후손이거나 반청복명(反淸復明)을 위해 조선으로 온 사람들, 혹은 명의 멸망 이후 요동지역 등으로부터 유입된 유민들이었다. 조선인들은 이들을 황조인(皇朝人) 또는 황조유민(皇朝遺民)이라 명명하고 존주론에 입각해서 이들을 대하고 관직을 하사했으며 이들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명 유민은 조선 사대부의 인정을 받거나 사대부 사회에 끼지 못했다. 이 글에서는 그 예로 강세작과 굴저에 대한 재현 양상을 들고 이들이 처한 언어 문제가 명 유민의 위치를 의미심장하게 드러낸다고 보았다. 강세작은 언어를 제대로 소통하지 못 하고 굴저는 자신이 이름이 제대로 불리지 못했다. 강세작은 중국어도 잊어버리고 조선어는 제대로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문은 구사할 수 있었지만 이전의 모국어와 새로운 모국어 사이에서 말을 잃어버린 강세작은 언어의 경계에 위치해 있었고, 이는 경계에 처한 그의 삶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 경계에서 강세작은 주체로서의 삶을 살았다고 하기 어렵다. 자신의 본래 이름을 잃어버린 채 비슷한 이름으로 불린 굴저 역시 주체로서의 삶을 살았다고 보기 어렵다. 강세작, 굴저와 달리 명 유민들은 경제적으로도 곤궁하고 중인 정도의 대우를 받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명 유민의 후손에 의한 명 유민의 전이 기록되었는데 이를 조선 지식인의 명 유민 서사에 대한 명 유민의 대항서사로 보았다. 그러나 명 유민의 서사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강화함으로써 안과 밖의 경계를 더욱 강화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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