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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신은이 (대구광역시청)
저널정보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영남학 영남학 제84호
발행연도
2023.3
수록면
107 - 140 (3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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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나당전쟁기 고구려 부흥운동 세력을 둘러싼 신라와 당 사이의 갈등과 그 추이를 살폈다. 670년 신라는 백제 고지 점령을 본격화하는 한편, 고구려 부흥운동 세력을 지원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은 신라의 행보에 대해 당은 「설인귀서」를 보내 신라가 안승을 외원으로 삼아 백제 고지를 점령해 나감에 대한 불만을 나타냈다. 그에 대해 신라는 「답설인귀서」에서 백제 고지 점령에 대해서는 정당성을 주장하였지만, 당에 대한 배반 행위는 없었다고 밝혔다. 「설인귀서」와 「답설인귀서」의 내용을 대조해 보았을 때, 당시 나당관계에서 외교적 쟁점이 된 ‘신라의 당에 대한 배반 행위’는 신라와 고구려 부흥운동 세력의 연합에 대한 것이었다. 하지만 672년 고구려 고지에서 전개된 석문전투에서 신라는 크게 패전하였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 부흥운동 세력과 연합한 사실까지 당에게 밝혀졌다. 이때 신라는 대당 사죄사를 파견하여 고구려 부흥운동 세력과 연합한 사실에 대하여 당에게 사죄하였다. 당은 674년에 ‘신라가 고구려 부흥운동 세력을 받아들여 백제 땅을 지키게 하였다’는 사실, 즉 보덕국을 명분으로 문무왕의 관작을 삭탈하고 신라에 대한 공격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보덕국은 고구려의 체제와 제사를 계승하였고, 신라에 의해 안승은 고구려왕으로 책봉되었으므로 사실상 고구려가 재건된 것과 마찬가지였다. 당은 오랜 시간에 걸쳐 공략한 고구려가 재건된 것에 대해 경계하였을 것이다. 675년 신라는 대당 사죄사를 파견하였고, 곧이어 문무왕의 관작은 회복되었다. 하지만 676년 기벌포 전투까지 신라와 당 사이에는 여러 번 교전이 이어졌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신라의 백제 고지 점령이 곧 당의 신라 공격으로 이어졌다고 보았다. 이글에서 살펴본 바에 따르면 나당전쟁에서 고구려 부흥운동 세력을 둘러싼 신라와 당 사이의 갈등은 점차 증폭되어 갔고, 결국 당은 674년 보덕국을 명분으로 신라에 대한 전면전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당시 토번과 고구려 고지에 대한 안정적 지배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이었음에도 당이 서둘러 신라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게 된 것은 보덕국을 중심으로 한 고구려 부흥에 대한 염려 때문이었을 것이다. 기존 나당전쟁에 관한 연구들이 백제 고지를 둘러싼 신라와 당 사이의 갈등을 군사적 측면에서 살펴보았다면, 이 글은 외교문서, 대당 사죄사 파견과 같은 외교적 사실도 함께 고찰하였다. 나당전쟁에 대한 보다 새로운 이해와 관점을 제시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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