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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문경호 (공주대학교)
저널정보
역사문화학회 지방사와 지방문화 지방사와 지방문화 제22권 제2호
발행연도
2019.11
수록면
209 - 239 (31page)
DOI
10.17068/lhc.2019.11.22.2.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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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공세곶창은 세종 대에 처음 수조지로 선정된 이래 19세기 말까지 그 역할을 유지한 유서 깊은 조창이다. 본래는 면천의 범근내포와 직산의 경양포 등지에서도 조세 운송을 담당하였으나 성종 대에 두 포창이 폐지되면서 40개나 되는 군현의 조세를 모아서 한양으로 올려보냈다.
공세곶창에는 본래 倉舍가 없었다. 그러나 1523년(중종18)에 이르러 80칸의 창고를 짓게 되면서 비로소 조창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이 무렵에 창의 명칭도 공세곶창이라는 이름대신 貢津倉이라고 불리게 된 것으로 보인다. 공진창에 창성이 건립된 것은 그보다도 훨씬 더 후인 1631년의 일이었다. 그러나 중종 대를 전후하여 私船 이용 및 지역별 조세납부가 확대되면서 공진창의 역할과 중요성은 점차 약화되었다. 또한, 19세기에 접어들어 조세의 금납화가 확대되고, 그로 인해 여러 가지 병폐가 겹쳐지면서 『대전회통』이 편찬되던 1865년(고종 2) 무렵에 폐지되었다. 공진창이 폐지된 후 북쪽 언덕에는 공세리 성당이 세워졌다.
공세곶창의 구조에 대해서는 17세기에 제작된 「침해당기」와 파스키에(Pierre Pasquier) 신부의 편지, 그리고 조선 후기에 그려진 지도 등에 단서가 될 만한 사항들이 있다. 이들 자료를 종합하면 倉城은 입암산 아래에 있었다. 창성의 전체적인 형태는 북쪽 언덕 위의 둥근 曲城과 남쪽의 평지를 둘러싼 길쭉한 사각형의 성곽이 합쳐져 표주박의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북쪽 언덕의 곡성 안에는 기우제를 지내는 제단이 자리잡고 있었고, 그 아래 평지에는 창고 시설이 늘어서 있었으며, 곡성과 창고 사이 높은 곳에는 봉상청이 있었다. 그리고 성곽의 바깥 양쪽에는 백성들의 민가가 제비집처럼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공진창 유적은 건립 시기가 명확할 뿐 아니라 창성의 흔적이 비교적 잘 남아있다는 점에서 매우 희소하고 중요한 유적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건립할 때부터 폐지될 때까지의 역사를 파악할 수 있는 자료들이 있어 그 변화의 추이를 파악할 수도 있다. 다만, 전체적인 창성의 구조나 지형변화 등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연구가 미흡한 면이 있다. 또한, 『여지도서』 등에 기록된 창성의 길이와 실제 창성의 길이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문제점도 해결해야 할 과제 중 하나이다.

목차

[초록]
1. 머리말
2. 조선 초 조운제 정비 과정과 충청지역의 조창 운영
3. 공세곶창의 역사적 변천
4. 공세곶창의 입지와 구조
5. 맺음말
[참고문헌]

참고문헌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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