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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崔相哲 (동방문화재연구원)
저널정보
한국문화사학회 문화사학 文化史學 第59號
발행연도
2023.6
수록면
109 - 144 (36page)
DOI
10.29334/MHSH.2023.06.59.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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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도 연해읍성은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하여 일찍부터 축성되었다. 초기의 읍성은 주로 고려시대의 토성을 석축성으로 수축하였으며, 태종17년(1417) 이후부터 석축의 읍성이 신축되기 시작하였다. 세종11년(1429)부터는 연해읍성이 본격적으로 축성되었다.
연해읍성은 조선전기에 14개소가 있었으며, 이 중 조선후기까지 11개소가 유지되었고 3개 읍성은 성벽 없이 관아만 운영되었다. 세종11년(1429)을 기점으로, 성문은 새로운 형태가 등장하고 수치의 변화가 나타나며 옹성은 축조순서가 변화한다.
성문 개구부의 평면은 적을 접하는 면이 많아지도록 ‘一’자형에서 ‘凸’자형으로 변화하고, 문구부의 너비는 줄어들어 육축부가 넓어진다. 옹성은 체성을 완성한 후에 덧붙여 축조하던 방식에서 체성과 함께 축조하는 방식으로 변화한다. 세종20년(1438) 「축성신도」 반포 이후에는 세종11년부터 등장한 축성기법이 그대로 이어지는 가운데, 추가적으로 문전부의 규모가 커지는 변화가 일어난다.
조선후기에는 연해읍성의 수량이 전체적으로 감소한 가운데,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성문의 수량이 줄어들고 옹성의 수가 증가하며, 성문의 통로가 축소된다.
이로 보아, 조선시대 충청도 연해읍성의 성문과 옹성은 세종11년에 축조방식이 큰 틀에서 정립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후 세종20년에 체성의 축조기법 및 문전부의 규모 등을 일부 개선하고 정리하였으며, 다시 세종25년에 체성의 축조기법이 변경된 것으로 판단된다.

목차

요약
Ⅰ. 머리말
Ⅱ. 국가방어체제와 연해읍성
Ⅲ. 史料 검토
Ⅳ. 考古조사 자료 분석
Ⅴ. 성문과 옹성의 변천
Ⅵ.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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