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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학회 사학연구 史學硏究 第91號
발행연도
2008.9
수록면
1 - 47 (47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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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에 실린 신라 초기 왕계와 주요 집단의 出自에 대한 기사는 국내기록과 현격한 차이가 있다. 국내기록에는 시조 ‘朴赫居世’와 건국기 주요 집단[六村]으로 ‘朝鮮 遺民’이 서술되어 있다. 반면 중국정사에는 신라가 馬韓王의 지배를 받거나 百濟人을 王으로 삼았다고 하며, 족적 구성도 ‘辰韓種’?‘秦世亡人’?‘樂浪流民’?‘高句麗殘留民’?‘弁韓의 後裔’ 등으로 되어 있다. 우선 ??三國志??의 ‘진세망인’이나 ‘아잔’의 내용은 辰韓耆老의 傳言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隋書??의 ‘고구려 잔류민’과 ‘백제인 신라왕’ 기사는 ??삼국지?? 동이전의 ‘序’와 ‘評’에서 ‘爲新羅’의 계기를 찾고, ??삼국지?? 한전에서 신라왕의 출자를 추론하였던 것이다. ??구ㆍ신당서??에서는 당의 지배층이 지녔던 삼한을 삼국과 동일시하는 왜곡된 인식이 신라의 과거사로 서술되기도 했다.
신라는 4세기 중후반 奈勿王代부터 중국과 斷片的인 외교 관계를 가졌고, 6세기 말부터 수?당과 꾸준히 왕래하였다. 그 와중인 6세기 초중반 신라는 진흥왕의 ??국사?? 편찬과 더불어 고유의 시조관과 족적 출자에 대한 정리가 있었지만 중국에 전해지지 못했다. 이는 신라의 후진성으로 인해 중국과 외교 관계의 수립이 늦었던 까닭에 신라전의 입전도 늦어 신라 초기 상황에 대한 기록이 부재하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나물왕은 김씨 왕으로 박씨 집단의 시조이자 건국 시조인 ‘혁거세’와 그를 추대한 ‘육촌’에 대해 언급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이후 왕권을 독차지한 김씨왕실은 가계의식의 구체화와 分枝化 속에 시조관이 변천되었으므로 자신들의 시조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중국에 전하지 못하기도 했다.
한편 신라와 단편적으로 교류하던 시기의 중국 사가들은 기존 전통을 답습하는 제한된 시각에서 이 사항을 서술했다. 또한 꾸준한 외교 관계를 갖던 시기인 수?당대 사가들은 中華的 覇權主義의 시각에서 신라의 역사적 실체와 상관없이 그들의 사고와 관념에 충실한 기사를 남겼다. 이상과 같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 동일한 과거를 지닌 신라사임에도 불구하고 신라인들의 고유 인식과 유리된 기록이 중국 正史에 출현하게 되었던 것이다.

목차

요약
머리말
Ⅰ. 「新羅傳」의 入傳 樣相
Ⅱ. 諸 「新羅傳」 關聯 記錄의 分析
Ⅲ. 關聯 記事의 記錄 未備 原因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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