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질문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한국고대사학회 한국고대사연구 한국고대사연구 42
발행연도
2006.6
수록면
103 - 136 (34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질문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이 글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전거자료가 어떻게 형성되어 갔는가를 밝혀보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전거자료의 미비로 인하여 초기기록의 기년 문제를 중심으로 추구하였다. 신라본기 중에서도 건국신화 및 시조전승의 구성, 상고 왕실 기년, 그리고 신라본기 초기기록의 구성에 대해 살펴보았다.
신라본기 서두의 건국신화는 혁거세가 진한육촌 세력의 추대에 의해 거서간이 되었다는 것인데, 이는 사로국이 아니라 신라국가의 건국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건국시조로 나오는 혁거세는 박씨 왕실의 시조이지만, 사실은 김씨 내물왕의 신라국가 건국을 반영한 것이다. 박씨와 김씨의 시조전승은 『國史』의 편찬에 즈음하여 일차적으로 정리되었고, 석씨 시조전승은 문무왕대 이후에 정리되었을 것이다. 초기기록의 삼성 왕실계보에서는 박제상 이차돈 미추왕의 기년 문제가 있었다. 기왕의 견해에 의하면 초기기록의 왕통이 일원적인 것으로 보았으나, 박씨와 석씨 두 왕통은 병립되어 있었고, 박씨 왕통을 이은 김씨 왕통이 5세기 초반 눌지왕대에 석씨 왕통을 통합한 구조로 보았다.
신라본기의 초기기록 가운데 왕실계보 소국정복 등의 기사는 상고 왕실의 기년을 수정 인하한 연대에 있었던 사실이다. 반면에 천재지변기사는 중국의 기록을 전재한 것에 불과하며, 대외관계기사는 6세기 전후의 사실이었다. 대외관계기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관리임명기사는 7세기 이후의 한자식 인명표기방식을 취하고 있었다.
위와 같이 살펴볼 때 초기기록은 7세기 후반 문무왕대 이후 일원적인 삼성 왕통으로 구성되어, 『삼국사기』의 신라본기에까지 전해졌을 것으로 추정해 보았다. 신문왕대 이후 새로이 역사편찬을 하면서 초기기록이 구성되었는데, 이는 삼국통일을 이룩한 신라의 유구한 역사를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건국신화 및 시조전승의 구성
Ⅲ. 상고 왕실 기년의 구성
Ⅳ. 신라본기 초기기록의 구성
Ⅴ. 맺음말
부록
참고문헌
日文抄錄

참고문헌 (9)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이 논문과 함께 이용한 논문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

UCI(KEPA) : I410-ECN-0101-2009-911-0156219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