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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사학회 문화사학 文化史學 第21號
발행연도
2004.6
수록면
401 - 416 (1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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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B. C. 57~935)는 한국사에 있어서 가장 긴 역사를 지닌 나라였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한 왕조가 1천 년을 유지한 예는 거의 없다. 이러한 장기존속에는 그 자체의 바탕이 있었을 것이며 신라사회가 갖고 있는 내적 원동력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動因이나 배경에 대한 연구는 보이지 않는다.
분명히 처음에 신라는 허약하고 소극적인 나라였다. 그러나 취약한 사회상을 이끌고 백제와 고구려를 정복한 후, 당군을 한반도에서 축출한 것은 역사적 대사건이었다. 신라는 그 스스로 통일은 물론 중대사회의 번영을 가져올 바탕이 있는 나라였다. 여기서 신라사의 성격을 재조명할 필요성을 느낀다.
신라는 약소국으로 출발하였으나 그 지정학적 위치로 말미암아 국민적 유대와 융합이 가능하였다. 또한 백제와 왜의 빈번한 침입으로 국가적 안위와 국민적 단합을 필요로 하였다. 더구나 역대 왕의 덕목과 품성이 관대하여 국민과의 거리를 좁힐 수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시해야 할 것은 정신적인 자각과 국가체제가 정비되어 국민을 하나의 통치권으로 묶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즉, 정치ㆍ군사제도의 정비를 통해 백성을 ‘하나의 공민으로서’ 동원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했으며, 동시에 농민층은 이에 참여할 수 있게끔 ‘국민화’가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더구나 역대 왕의 仁政과 백성들의 자각이 滅私奉公이란 국가의식으로 승화되어 6세기 이후에는 花郞을 앞세워 3국 중 최대 강국으로 도약할 수 있었다. 이어 6세기 이후 3국간의 갈등과 대중국외교를 통해 신라는 통일의 바탕을 마련할 수 있었다.
신라는 비록 약소국으로 출발하였으나 최초의 전근대 민족을 통일하였고 유교와 불교를 결합시켜 하나의 민족종교로 개발함으로써 발달된 통일신라 문화를 남기게 되었다. 나아가 정치ㆍ사회 등 전반적인 제도상 전통사회의 원형을 이루어 고려ㆍ조선 왕조로 이어지게 하였다. 결국 신라는 최초의 민족 통일 왕조만이 아니라, 민족문화의 根幹과 한국 전통사회의 제도적 기반을 마련한 나라였다. 그러나 敬順王의 新羅歸附에 보여 진 지배층 위주의 悲劇的 變節은 김부식의 평가와는 달리 권력유지의 한 방편에 불과하였다. 따라서 국민의 상하화합은 王公貴族의 자기도피로 깨진 결과가 되었다.

목차

요약
Ⅰ. 머리말
Ⅱ. 한국사에서의 신라의 위상
Ⅲ. 신라인의 국가의식
Ⅳ. 신라인의 문화적 긍지와 자율정신
Ⅴ. 맺음말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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