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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서종태 (해미국제성지 신앙문화연구원)
저널정보
수원교회사연구소 교회사학 교회사학 제25호
발행연도
2024.9
수록면
5 - 71 (67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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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에 의하면 이벽(李檗)의 자(字)는 처음에 ‘괴채(傀棌)’였으나 뒤에 ‘덕조(德操 또는 德祖)’로 바뀌었다. 1784년에 출생한 그의 아들은 첩인 해주정씨 소생의 서자이다. 그의 이름은 처음에 ‘현개(顯介)’였으나 뒤에 ‘현모(顯謨)’로 바뀌었다. 이벽은 1754년에 경기도 양주군 신혈리(현 서울시 은평구 진관외동)에서 출생했다. 그는 1773년(20세) 이후에 부모를 따라 포천군 화현리(현 포천시 화현면 화현리)로 이주했고, 1785년에 그곳에서 가정의 박해를 받아 순교했다. 이벽은 부친의 뜻에 따라 무과에 급제해 무관으로 출세하기 위해 서울 저동에 살며 청교동에 사는 백동수(白東修)에게 무예를 배웠다. 그는 백동수와 친밀한 북학파 실학자 박제가(朴齊家)·성대중(成大中) 등과 학문적으로 교유하면서 서학서를 열람하고 탐구했다. 뒤에 그는 무과 공부를 포기하고 1774년부터 충청도 덕산에 사는 이병휴(李秉休) 밑에서 학문을 닦았고, 이병휴가 1776년 사망한 뒤에는 그의 학통을 계승한 권철신(權哲身) 밑에서 학문을 닦았다. 아울러 거처를 수표교 근처로 옮겨 서학서를 탐구하던 이벽은 1783년 겨울경에 선교사의 전도 없이 천주교를 자발적으로 수용했다. 이벽은 1783년 겨울 동지 때 중국에 파견하는 사신의 일원인 부친 이동욱을 따라 청나라에 가는 이승훈(李承薰)에게 북경의 천주당에 가서 서양 선교사들에게 수학을 배우면서 천주교 교리도 배우고 영세한 뒤 신앙 생활에 필요한 서적과 성물 등을 구해 오도록 은밀히 부탁했다. 서양의 수학에 관심이 많은 이승훈은 이벽의 부탁대로 북경의 천주당에 가서 서양 선교사들에게 수학을 배우면서 천주교 교리도 배우고 영세한 뒤 신앙생활에 필요한 서적과 성물 등을 구해 와 이벽에게 건네주었다. 이벽은 그 서적들을 가지고 광주 천진암에 가서 깊이 연구하여 마침내 신앙생활에 필요한 천주교의 교리 전반에 대해 이해하게 되었다. 이후 전교에 나선 이벽은 주도면밀한 전략으로 전교 활동을 펼쳐 큰 성과를 거두었다. 우선 정조가 태학생(太學生)에게 내린 『중용(中庸)』 80여 조목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인척 관계가 있는 태학생 정약용(丁若鏞)이 잘 작성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 그가 정조의 칭찬을 받게 한 뒤, 1784년 4월 15일(음력) 그와 그의 형 정약전(丁若銓)에게 전교하여 그들을 입교시켰다. 그런 다음 이벽은 친분이 두텁고 학문적으로 자신을 따르던 최창현(崔昌顯)·최인길(崔仁吉)·김종교(金宗敎)·김범우(金範禹) 등의 중인들에게 전교하여 그들을 입교시켰다. 이어 이벽은 성호학파 실학자 중에 명성이 높은 이가환(李家煥)·이기양(李基讓)·권철신(權哲身)을 차례로 입교시켜 그 명성을 이용하여 천주교를 더욱 널리 전파하고자 했다. 그들 중 이가환과 이기양을 입교시키는 데는 실패했지만, 각지에서 찾아온 많은 문도를 거느린 권철신과 그 동생 권일신(權日身)을 입교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 결과 1784년 겨울에 조선 천주교회가 한양의 수표교 근처 이벽의 집에서 처음으로 설립되고, 이어 천 주교가 경기도·충청도·전라도 각지로 전파되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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