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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차삼임 (영산대학교)
저널정보
온지학회 온지논총 온지논총 제70호
발행연도
2022.1
수록면
65 - 94 (3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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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서원십영(書院十詠)> 서원 배향(配享) 인물을 통해 본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서원관을 고찰한 글이다. 주지하다시피 이황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으로 일컬어지는 백운동서원(白鹿洞書院)을 사액서원(賜額書院)으로 승격시킨 인물이다. 백운동서원은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이 1543년 풍기군수 재직 중 안향(安珦)의 학덕(學德)을 기리기 위해 주희(朱熹)가 중수한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본 따 풍기군 순흥면에 백운동서원을 건립하였는데, 이 서원에 사액이 내려지면서 소수서원(紹修書院)으로 개칭되었다. 이황은 최충(崔?)?우탁(禹倬)?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김종직(金宗直)?김굉필(金宏弼) 등 선정(先正)의 자취가 있고 향기가 뿌려져 있는 곳에 모두 서원을 건립해야 한다고 하면서, 생전에 자신은 물론 제자들과 함께 10여개의 서원 건립과 중건에 직?간접으로 관여한 인물로, 이러한 기록이 잘 남아 있는 작품이 <이산서원기(伊山書院記)>, <역동서원기(易東書院記), <영봉서원기(迎鳳書院記)>, <서원십영(書院十詠)>이다. 이황은 서원 건립의 당위성에 대해 하?은?주(夏殷周) 삼대(三代)가 융성할 때 교법(敎法)이 매우 잘 갖추어져 있었으나, 후세에 와서 가르침과 배움이 무너져 국학과 향교는 겨우 형식만 남아 있었기 때문에 배우기를 간절히 원하는 선비들의 바램에 의해 서원이 생기게 되었다고 하였다. 아울러 서원의 교육 효과에 대해 국학이나 향교가 사람이 많이 모이는 성곽(城廓) 안에 있을 뿐 아니라 학령(學令)에 구애되고 과거 등의 일에 유혹되기 때문에 위기지학(爲己之學)을 추구하는 유학 본령에 비추어 볼 때 관학보다 크다고 자신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이황은 제자들과 함께 서원 건립에 직?간접으로 참여하면서 지은 <이산원규>는 영남지역 서원 운영의 정형화를 제시한 것으로 높이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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