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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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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신라사학회 신라사학보 신라사학보 제51호
발행연도
2021.4
수록면
165 - 205 (41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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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와 고구려의 멸망 이후 그 고지에 羈縻州를 설치하면서 신라와 병존시키고자 하였던 당의 한반도 정책은, ‘平壤以南 百濟土地’로 대표되는 명분하에 참전의 보상으로서 일정한 영토를 새로이 획득하기를 원했던 신라의 의도와는 양립할 수 없었다. 특히 고구려 멸망을 계기로 이 같은 양국의 잠재적인 갈등은 점차 표면으로 드러나기 시작하였는데, 이 때 신라는 검모잠・안승 등의 고구려 유민들과 밀접한 연계를 매개로 한반도에 대한 당의 羈縻州 체제를 크게 뒤흔드는 한편, 적어도 浿江 以南(황해도)~比列忽(원산만)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을 대상으로 한 직・간접적인 영향력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이는 더나아가 해당 지역들을 서북-동북 방면의 두 축으로 삼아 추후 예상되는 당군의 공세를 저지할 방어선으로서 설정하고자 했던 신라의 전략적 구상이 반영된 것이기도 했다.
이 같은 신라의 대전략은 나당전쟁 발발 이후 전쟁 초반인 672년 무렵까지는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는데, 즉 그 동안 안승 등은 漢城(황해도 재령)을 중심으로 고구려 세력을 재건하고 평양 인근 지역까지 진출・장악하는 한편 신라는 수군 활동을 통해 서해안의 제해권을 장악하면서 당군의 남하를 견제하였던 것이다. 더 나아가 그 와중에 신라는 전력을 집중하여 백제고지의 평정을 신속하게 완료함으로서 양면전선의 위험성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그러나 672년 후반에 이르러 남하한 당군이 교두보를 확보하고 본격적인 공세에 나서자, 신라는 그들의 ‘藩屛’으로서 고구려고지에 대한 전략적 구상의 핵심 요소이기도 한 서북방면의 고구려 세력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서 대규모 중앙군을 동원하여 적극적인 개입에 나섰다. 그러나 석문전투에서 신라・고구려 연합군이 크게 패배하면서 이 같은 전략은 크게 수정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이 전투를 계기로 고구려 세력이 힘을 잃고 그 수뇌부가 신라로 망명하면서 고구려고지 방면의 방어선이 본래의 구상과는 달리 크게 후퇴하였을 뿐 아니라, 당과 신라 사이에 직접적인 군사적 대결이 불가피하게 되었던 것이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고구려 멸망 이후 당의 한반도 정책과 신라의 불만 누적
Ⅲ. 670년 고구려 부흥운동의 발생과 신라의 개입
Ⅳ. 672~673년 고구려 부흥운동의 와해와 신라의 전략 변화
Ⅴ.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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