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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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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저자정보
이규호 (동북아역사재단)
저널정보
고구려발해학회 고구려발해연구 高句麗渤海硏究 第81輯
발행연도
2025.3
수록면
69 - 94 (2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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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충주고구려비』의 내용을 바탕으로 5세기 중엽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살펴본 것이다. 충주고구려비는 449년 5월과 12월의 내용으로 나뉘고, 이 중 5월은 의복 사여를 매개로 한 고려 대왕과 신라 매금의 의례행위를 전한다. 여기에서는 신라 매금 뿐 아니라 衆人으로 표기된 그의 신하들까지 포함되어 있었고, 이는 고려 대왕이 신라 매금 예하의 지배층까지도 자신의 영향력 하에 있음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의식이 충주에서 진행된 것은 남한강 유역에서 백제를 밀어내고 신라와의 관계를 더욱 확고하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고구려는 427년 평양으로 천도한 이후 본격적인 남한강 진출을 시도했는데, 현지 지배층의 권위를 인정하는 식으로 영향력을 확대했다. 따라서 비가 세워진 449년 무렵에는 이 일대에서 고구려의 지배력이 확고했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에, 양국의 접경지대이자 요충지인 충주는 양국 간의 관계를 재확인하기에 주요한 지역이었다. 5월조에 나타나는 奴客人이라는 존재는 남한강 일대의 현지 지배층을 가리키며, 그들 역시 의복의 사여를 통해 고려 대왕에 충절을 맹세했다고 보았다.
한편 12월에는 5월의 의례 행위에 따른 관계 확인을 바탕으로 고구려의 신라 영내 활동이 기록된 내용이라고 파악하였다. 당시 고구려의 관리는 신라의 영토에서 인력과 물자를 모집했는데, 이것은 조세의 일종으로 간주되는 인력 동원을 타국의 관리가 주관했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상황이라고 보기 어렵다. 당시 신라는 현지 지배층을 통해 지배력을 행사하는 단계였고, 이는 그들의 협조가 지방 통치의 필수적인 요건이었다. 그런데 신라의 영내로 이해되는 우벌성에서 고구려 관리의 인력, 물자 모집이 이뤄진 것은 현지 지배층에 대한 고구려의 포섭이 진행된 결과로 이해하였다.
이와 같은 점을 통해 볼 때, 5세기 중엽 고구려의 신라 방면 정책은 현지 세력의 포섭을 통한 신라 중앙 조정의 압박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는 이미 신라 왕위 계승에 직접적으로 관여하고 있던 것에 더해, 지방에서부터 신라 중앙의 영향력을 약화시킴으로써 삼국의 경쟁구도에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신라를 유도하려는 목적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충주고구려비의 내용 검토
Ⅲ. 고구려의 남한강 유역 진출과 충주고구려비 건립목적
Ⅳ. 고구려의 신라 북부 회유 시도와 募人의 의미
Ⅴ.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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