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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고수연 (유원대학교)
저널정보
호서사학회 역사와 담론 역사와 담론 第92輯
발행연도
2019.10
수록면
203 - 244 (42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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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 後期 英祖 4년(1728)에 일어난 戊申亂은 老論 · 少論 · 南人의 정치적 갈등이 兵亂으로 폭발한 사건이었다. 반란이 진압된 이후에도 무신란을 지지하고 표방한 ‘戊申餘黨’들은 다시 한 번 반란을 통하여 정계 복귀 내지는 정권 탈취를 위하여 謀反事件을 일으켰다. 이 글에서는 조선시대 중죄인의 조사서와 판결서를 모은 『推案及鞫案』을 검토하여 무신여당의 모반사건이라고 판단되는 11건을 추려내어 검토하고 그 양상을 정리하였다.
11건의 무신여당 모반사건은 무신란 직후부터 30여 년 동안 전국적으로 발생했다. 이것은 무신란이 진압된 이후에도 상당기간 동안 무신란을 지향하는 세력이 존재하고 있었고, 그들이 무신란과 같은 반란을 시도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무신여당의 모반 방식은 괘서 · 모의 · 시장 투서의 형식이었다. 掛書의 경우 民心 선동, 즉 여론의 형성이 가능하여 적극 사용되었다. 試場 投書 역시 왕과 많은 사람이 함께 모인 공개적인 과거시험장에서 흉역을 적은 시장을 왕에게 바치는 노골적인 행위로 민심을 자극하는 파급력이 있었다.
무신여당의 인적 구성을 보면 무신란에 직접 가담했던 인물, 소론계 인물, 남인계 인물, 무신란을 모방한 다양한 계층으로 나누어서 살펴볼 수 있었다. 1728년에 일어났던 무신란은 少論 峻論과 남인이 중심이 된 사족의 반란이었지만, 이후 영조 대 무신여당의 활동에는 소론 준론과 남인은 물론 몰락한 지방의 사족이나 中人 · 良人 등 다양한 계층이 가담함으로써 무신란에 비하여 모반사건에 가담하는 계층이 확대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鄭鑑錄』과 『道詵秘記』에 영향을 받은 무신여당의 모습도 확인되었다.
무신여당 모반사건의 지역별 동향을 살펴보면 전라도의 유배지와 충청도 청주 지역에서 일어난 모반사건이 많았다. 이것은 반란을 일으켰던 인물들이 유배를 가서도 무신란의 재현을 시도하였던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청주 지역의 경우 무신란 당시 병영성 점령에 성공했고, 한양으로 진출한 반란군의 교두보가 되었던 지역으로 반노론 정서가 남아 있어서 무신여당의 모반활동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기존 연구에서는 무신란 이후 실세한 소론들이 주로 무신여당으로 모반사건을 일으켰다고 보았다. 그러나 11건의 무신여당 모반사건 검토로 인하여 무신여당 인적 구성의 한 축은 지방의 남인이나 중인 · 양인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다만 당시 조정에서는 중앙 정치에서 소론을 견제할 필요가 있어서 소론 준론이 일으킨 무신여당 사건을 더욱 강조했던 것으로 보인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추안급국안』에 기록된 무신여당 모반사건
Ⅲ. 무신여당 모반사건의 방식과 인적 구성
Ⅳ. 무신여당 모반사건의 지역별 동향
Ⅴ.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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