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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한국서예학회 서예학연구 서예학연구 제31호
발행연도
2017.1
수록면
161 - 190 (3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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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재(石齋) 서병오(1862〜1936)는 대구를 중심으로 활동한 시서화 삼절의 서화가로 1922년 ‘교남 시서화 연구회(嶠南詩書畫硏究會)’를 설립하여 지역 서화의 전개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조선미술전람회 심사위원을 여러 차례 지내며 전국적으로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서병오는 안진경체에 바탕 한 행서를 잘 썼으며 추사(秋史) 김정희(1786~1856) 서풍을 창조적으로 계승한 행서, 예서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이 연구는 서병오의 서예 중 김정희 행서, 예서의 영향을 받았음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작품을 김정희의 작품과 상호 비교하여 김정희 서풍이 근대기에 서병오의 개성을 통해 확장되었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다. 서병오는 18세 무렵 서울에 머물 때 김정희의 제자인 석파(石坡) 이하응(1820~1898)의 지우를 받아 운현궁을 드나들게 되었고 이무렵 김정희 서풍을 열심히 배웠다. 이후 진사과에 급제하여 한학지식인으로서 다양한 활동을 하며 시서화를 향유하였고, 중년에 중국을 여행하며 민영익(1860~1914), 포화(1830〜1911) 등과 교유하며 그들의 작품에 영향을 받기도 하였다. 서병오는 50대 말경부터 서화가로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되는데 만년에 이르러 다시 김정희의 다양한 필적을 연구하며 학습하였다. 서병오는 ‘문자향(文字香)’, ‘서권기(書卷氣)’로 대변되는 김정희의 서화론과 우연적 의지를 중시하는 ‘우연욕서(偶然欲書)’의 창작론을 수용하였으며, 김정희가 주장한 서예 학습론을 따라 서한 예서인 고예(古隸) 임서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1920년대 후반 이후 서병오는 안진경체의 바탕 위에 김정희의 금석기 있는 강건한 획법과 참치한 결구법을 소화한 김정희풍 행서 작품을 다수 남겼다. 예서에 있어서도 이체자(異體字)의 활용, 곡직(曲直)을 자유롭게 운용한 필획, 졸박한 결구, 파격적인 장법 등 김정희 예서의 조형성을 자신의 필성(筆性)으로 소화한 예서 작품을 남겼다. 서병오는 근대기 서예가로는 거의 유일하게 김정희 서풍을 계승하며 김정희 서풍이 갖는 조형성을 자신의 개성으로 재창조하였다. 그가 만년에 김정희 서풍을 다시 배운 이유는 한중일을 여행한 풍부한 견문을 통해 김정희가 이룬 탁월한 조형적 성취를 확신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울러 김정희의 제자인 이하응의 문하에서 보다 직접적으로 김정희 서풍을 접했던 개인적 연고와 서병오가 태어나고 활동한 대구지역의 김정희 서예 애호 분위기도 영향을 미쳤다. 서병오가 외국의 대가가 아니라 조선시대 김정희를 학습한 사실은 중국이나 일본의 당대 유행서풍에 더 많은 영향을 받은 근대기 서단에서 주목되는 사실이다. 서병오는 성숙한 자기화를 통해 김정희 서풍의 확장을 이루어 국제화의 시기였던 근대기에 조선의 서예 전통을 계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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