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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한국서예학회 서예학연구 서예학연구 제31호
발행연도
2017.1
수록면
139 - 159 (21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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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 소산 오규일에 주목한 이유 한국 전각사에서 오로지 전각으로 이름을 남긴 명인을 오규일 외에 찾기 어렵다는 점이다. 따라서 문헌을 통해 그의 생애와 활동양상을 추적하고 남겨진 그의 작품을 정리하는 일은 19세기 전각예술의 전개 양상을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지점을 확인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간헐적 기록을 통해 확인한 그의 생애와 전각 활동은 다음과 같다. 그는 1800년대 초반 한미한 중인 출신 대산 오창렬의 첫째로 태어났다. 이른 나이에 어머니를 잃은 오규일은 취미 삼아 전각을 시작한 듯하다. 그의 전각은 시간이 지나며 단순한 취미 이상의 열정으로 변했고, 그의 재능을 인정한 권돈인과 김정희는 문하로 받아들여 안목을 넓히고 실력을 쌓을 수 있도록 훈도하였다. 또한 부친 오창렬의 지우인 화가 조희룡은 이러한 오규일의 전각에 대한 재능을 뒤에서 은근히 지지했다. 특히 그의 전각에 있어 김정희의 영향이 매우 컸으며, 추사의 제주도 유배시절까지 가르침이 이어졌다. 젊었을 때부터 전각으로 두각을 나타낸 그는 아버지와 스승들은 물론, 영의정에 오른 이유원, 화가 조희룡 등의 인장을 새기며 전각가로서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또한 궁궐의 중요한 사인(私印)들도 대부분 제작할 만큼 명성을 얻어갔다. 그의 작품성향은 10년에 걸쳐 몇 번의 변화를 거쳤다. 처음에 옹방강을 위시한 석묵법을 익혀 고전을 바탕으로 한 순정한 전각을 제작하였고, 시간이 지나면서 아름다운 완성의 단계로 나아갔다. 후기에는 점점 개성을 찾아 자신만의 각풍을 수립해 나아간 것으로 보이나 이러한 시기, 즉 처음 전각에 손을 댄지 10년이 못되어 시력을 잃고 말았다. 한편 오규일이 남긴 전각 가운데 그의 작품으로 확정할 수 있는 사례는 아주 적다. 오규일의 전각 유물로 예산 김정희 종가 전래 인장 2점이 있는데, 각각 ‘완당’과 ‘김정희인’으로 새겨져 있다. 이 인장들은 1971년에 이미 보물로 지정되었고, ‘小山作’이라는 측관이 있으며, 김정희가 자신의 중요한 작품에 날인한 사실까지 확인하였다. 현재로서 오규일의 전각으로 확정할 수 있는 유일한 사례이다. 이 외 『근역인수』에 수록된 오창렬과 오규일의 인영 가운데 그의 전각으로 확실시되는 사례가 있다. 이를 통해 오규일의 전각성향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음각에 있어서는 전형적인 한인(漢印) 스타일의 인장이 많고, 서체는 무전(繆篆)을 흔히 채택하였으며, 각법은 충도법 보다는 절도법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반면 양각에 있어서는 좀 더 다채로운 양상을 보인다. 우선 서체에서는 인전(印篆)을 위시해 금문(金文), 소전(小篆)을 다양하고 구사하였고, 자신만의 디자인으로 장식한 인장들도 간혹 눈에 띈다. 끝으로 송암미술관 소장 다산 정약용의 인장이 오규일의 전각으로 전칭되고 있다. 그러나 정약용의 신앙문제, 오규일의 신앙문제, 출토품의 신빙성 문제, 유물 일괄에 20세기 인물의 것이 포함되어 있는 문제 등의 의문점을 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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