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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유우창 (부산대학교)
저널정보
부산경남사학회 역사와경계 역사와경계 제108집
발행연도
2018.9
수록면
29 - 66 (38page)
DOI
10.52271/PKHS.2018.09.1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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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기 전반에 우륵이 뜻밖에도 신라로 망명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가라에서 왕의 최측근 음악인으로서 왕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때로는 정치적 견해도 피력하며, 상당히 여유로운 삶을 살았을 우륵. 우륵은 왜 고독한 망명객의 신세를 선택했을까?
가라의 악사였던 우륵은 왕산악, 박연 등과 함께 우리나라 3대 樂聖으로 추앙받아 오고 있다. ‘악사’라는 지위에 걸맞게 우륵은 다양한 음악 활동을 한 것으로 보이지만, 이제까지 학계에서는 그를 가리켜 ‘정치인’이라 부르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가 결행한 신라로의 망명은 정치적 행동에 상당하며, 그 망명 동기 또한 매우 정치적이었기 때문이다. 본고에서는 ‘음악인 우륵’보다 ‘정치인 우륵’의 망명 동기와 망명 과정을 추적하였다.
6세기 벽두부터 맹렬하고도 끈질기게 영역을 잠식해오는 백제를 견제하기 위하여, 가라는 522년에 신라와 혼인동맹을 성립시켰다. ‘가라-신라 혼인동맹’이 맺어지는 과정에서 우륵은 ‘악사’라는 지위로 인하여 일정한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믿어진다. 신라에서 오는 사절을 접대하고 혹은 우륵 본인이 직접 신라에 혼인(준비)사로 갔을 경우도 충분히 상정된다. 우륵은 ‘친신라파’정치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른바 ‘변복’ 사건이 양국의 우호관계를 어긋나게 만들었다. 그 결과, 신라는 가라의 ‘도가 등 3성’과 ‘북경의 5성’을 함락시켰고, 가라는 종래의 ‘친신라 정책’을 철회하고 ‘친백제 정책’을 모색하게 되었다. ‘친신라파’로 낙인찍혀, 목숨까지 위태로웠던 우륵. 가라가 백제와 ‘상맹’을 맺고자 하는 모습을 보고, 그는 마침내 신라로 망명하고 말았다. 아마도 그 시기는 544년 3월∼548년 4월의 사이의 어느 때였을 것이며, 그 과정에는 거칠부의 도움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우륵 망명 이전 가라를 둘러싼 정세
Ⅲ. 가라의 반신라 정책과 우륵의 망명
Ⅳ.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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