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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여호규 (한국외국어대학교)
저널정보
한국외국어대학교 역사문화연구소 역사문화연구 역사문화연구 제79호
발행연도
2021.8
수록면
33 - 74 (42page)
DOI
http://dx.doi.org/10.18347/hufshis.2021.7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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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고구려의 남평양 건설과 운영양상을 고찰한 것이다. 최근 고구려의 남평양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견해가 다수 제기되었지만, 고구려가 475년 한강유역을 점령한 다음 남평양을 건설한 사실을 재확인했다. 고구려는 백제 도성 가운데 군사방어 기능이 뛰어난 몽촌토성을 재활용하는 한편, 평지성인 풍납토성을 폐기하고 한강 북안에 남평양을 건설했다. 남평양은 풍납토성처럼 강변의 평지에 입지했고, 평상시 거점의 기능을 수행했다. 아차산 일대 보루의 분포양상과 중랑천 일대의 고지형을 통해 장안평 일대를 남평양의 후보지로 상정했다. 서울지역은 서해 해로와 한강 수로가 만나는 결절점이면서 서북한과 한강 유역을 잇는 간선 교통로가 중남부 각지로 분기하는 육로망의 중심지이다. 이에 고구려는 남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교통망을 구축한 다음, 지방지배를 도모했다. 남평양은 고구려가 중부지역에 대한 지방지배를 시행하던 핵심 거점인 것이다. 고구려가 남평양을 건설하면서 서울지역의 정치적 중심지는 한강 북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점에서 고구려의 남평양 건설은 서울의 공간이동에서 분수령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신라도 한강유역 점령 직후에는 한강 북안에 아차산성을 축조해 한강유역 전체를 관할하는 거점으로 삼았다. 다만 7세기 중반에 북방의 군사적 위협이 높아지자, 한강 남쪽에 이성산성을 축조해 거점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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