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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현숙 (동북아역사재단)
저널정보
한국고대학회 선사와 고대 선사와 고대 제74호
발행연도
2024.4
수록면
87 - 114 (2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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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중남부 지역에서 확인된 고구려 유적‧유물의 편년을 보면, 임진강 유역 호로고루의 목책-충주-몽촌토성-금강 유역‧판교‧용인‧청계지구-아차산 일대-임진강 유역 고구려 석성 순으로 조성되었다. 임진강 유역과 충주지역 유적은 장기간 존속했고 군사시설, 생활유적, 무덤, 충주고구려비 등 다양하다. 하지만 나머지 유적들은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조성되고 유지되었다. 아차산 일대에는 군사시설인 보루들이 주로 남아 있다. 판교와 용인의 고구려계 석실분들은 숫자가 많지 않아 고구려인들이 장기간 거주하며 지역지배를 한 증거로 보기는 어렵다. 현재까지 확인된 문헌자료와 고고학 자료를 통해 고구려의 남진과정과 지배상황을 엿볼 수 있다. 즉 광개토왕 대에 한수 이북의 58성(城) 700촌(村)을 빼앗고 중부 내륙지역의 예(濊)를 흡수하면서 남한강유역까지 세력권을 확장했다. 양주지역도 이때 고구려로 편입되었다. 장수왕은 본격적인 영역지배를 도모했고 평양 천도 이후 이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475년에 백제 한성을 함락한 후 몽촌토성을 거점으로 판교, 용인 등으로 남진했다. 이때 충주에서도 청원, 대전 방면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그러나 백제 무령왕의 공격으로 한강 유역 일대를 일시적으로 상실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지역으로 들어온 백제도 안정적으로 지배하지는 못했다. 이 때문에 백제는 이 시기에 해당하는 유적들을 뚜렷하게 남기지 못했다. 이후 529년에 안장왕이 한강 유역을 되찾은 후 아차산 일대와 양주의 방어체계를 더 강화했지만, 551년 백제, 신라, 가야의 협공으로 고구려는 한강 유역을 상실하고 임진강 선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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