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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훈 (전북대학교)
저널정보
전북사학회 전북사학 전북사학 제66호
발행연도
2022.11
수록면
5 - 32 (2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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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남진정책 속에서 고구려 ‘남평양’의 설치와 그 위치 변화 및 변천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고구려 고국원왕시기 남방진출로 대방 고지로의 남진과정에서 전선이 길어져, 국내성에서 황해도로의 군수물자와 병력의 보장이 쉽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고구려는 황해도를 남진의 전초기지인 거점으로 삼아 남쪽에서 북상하는 백제를 견제하기 위한 거점성의 건립이 필요하였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고구려는 이 지역에 대한 지배력이 공고화된 4세기 후반에 황해도 신원군에 장수산성 및 그 주변의 유적을 창설하였다고 생각한다. ‘남평양’은 고구려 남방진출의 산물로서, 고구려 남방진출의 전초기지인 장수산성과 그 주변의 유적을 ‘남평양’으로 보는 것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삼국유사 · 고려사 등 문헌 자료의 ‘남평양’이 지금의 서울이라는 기록을 간과하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고구려 장수왕은 남진정책을 추진하였다. 475년에 장수왕이 백제 한성 및 한강 유역을 점령한 후, 고구려가 5세기 말에 한강 북안의 북한산군 즉 고려시대 양주(남경으로 승격된 양주: 종로구·중구 일대)에 부수도인 거점성 ‘남평양’을 설치하였다고 추정한다. 551년에 백제와 신라의 연합군이 한강 유역의 고구려에 대한 반격작전을 펼쳤다. 그 결과 백제가 한성을 비롯한 한강 유역의 옛 땅을 수복하고 고구려의 평양을 공파(攻破)하였다. 551년에 백제가 공파한 평양은 고구려가 427년에 천도한 수도 평양이 아니라, 5세기 말 종로구·중구 일대에 건립한 부수도인 ‘남평양’(북한산군)이라고 생각한다. 551년에 고구려가 한강 유역에서 상실한 ‘남평양’을 황해도 신원의 장수산성으로 옮겨 계속 부수도로 운영하였다고 추정한다. 551년에 한강 유역에서 황해도 신원군 장수산성으로 이전한 ‘남평양’은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 평양성·국내성과 함께 고구려 3경으로 불리었다고 추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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