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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李炳鎬 (공주교육대학교)
저널정보
한국고대사학회 한국고대사연구 한국고대사연구 제106호
발행연도
2022.6
수록면
117 - 152 (36page)
DOI
10.37331/JKAH.2022.6.106.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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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왕궁리유적과 미륵사지에서 발굴된 유물·유구의 변화 양상을 서로 비교하여, 왕궁리유적의 初築 시기와 왕궁에서 사원으로 성격이 轉換되는 시기에 관한 문제를 분석하였다.
Ⅱ장에서는 왕궁리유적이 개발된 시기를 파악하기 위해 그 내부에서 출토된 중국제청자와 기와의 연대를 검토하였다. 그 결과 中國製靑瓷의 상대편년에 근거할 때 이 유적이 6세기 중후반부터 개발되었을 가능성이 없지 않지만 蓮華文瓦當이나 ‘丁巳’명 문자기와 등을 부여 지역이나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기와들과 비교했을 때 7세기 초에 속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판단하였다. 백제 중앙의 익산 지역 개발은 6세기 말부터 시작되었다기보다는 武王(재위 600~641년) 즉위 이후인 7세기 초 이후부터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Ⅲ장에서는 왕궁리유적이 궁성에서 사원으로 성격이 바뀌는 시기를 검토하였다. 추정 금당지 주변에서 발견된 와당들은 이 유적의 궁성 단계 수막새와 同笵品이고, 건물지의 초석들은 다른 백제 사원의 금당지에서는 보이지 않는 특이한 기둥 배치를 보이고 있다. 현존하는 5층 석탑 북쪽에 자리한 추정 금당지는 궁성 단계의 內朝 正殿인 便殿과 같은 건물이었다가 목탑 같은 사원 건물이 조영되면서 佛殿으로 용도가 바뀌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왕궁리유적은 7세기 전반에 南北中軸線 구조를 가진 궁성으로 기능하다가 義慈王(재위 641~660년) 말년인 650년대에 사원으로 성격이 바뀐 것으로 생각된다.

목차

국문 초록
I. 들어가는 말
II. 익산 경영 개시 시기에 관한 재검토
III. 왕궁리유적의 사원 전환 시기와 미륵사지
IV. 나오는 말
참고문헌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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