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한국학논총 한국학논총 제47권
발행연도
2017.1
수록면
83 - 110 (28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신라는 삼국통일전쟁을 거치며 군사조직의 편성과 운영에 커다란 변화를 보였다. 『삼국사기』 직관지 무관조에 기록된 23개 군단(이하 23군호)은 그러한 과정을잘 담고 있다. 현재 23군호에 대한 고찰은 일정 부분 진행되었지만 여전히 미완상태로 존재하는 것이 많다. 자료가 소략한 때문이지만 적극적인 접근이 필요한 것도 분명한 현실이다. 계금당·이계당은 그러한 군사조직의 하나로서 고찰이 필요한데, 설치가 태종무열왕 원년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金春秋가 왕위에 오른 후 시행한 첫 군사정책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작지 않다. 신라중대의 개창과 더불어 창설되었다는 것은그만큼 정치적 의지가 강하게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 실권자로 정국을 이끌었던 김춘추는 진덕여왕 사후 즉위한 뒤 새로운질서의 수립을 강력히 추진했다. 계금당이 그것으로 신라중대 율령체제에 기반한율령군(律令軍)의 창설이었다. 이는 단순히 군단 하나의 증설이 아니라 신라중대적 질서를 상징하는 군사조직의 신설이었다. 계금당의 휘장은 신라중대 왕실의 직할군단으로서 새로운 군제를 표방하는 상징물로서 의미를 지녔다. 계금당의 군관23인 가운데 21인이 기병 지휘관으로 나타나고 있어 계금당이 삼국통일기 기동군단으로서 핵심 군사력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신라중대적 질서를 뒷받침하는핵심적 군사기반의 제도적 정비였다. 여제 멸망 후 나당전쟁의 전개는 계금당의 확대과정에 영향을 미쳤다. 나당전쟁이 점차 격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계금당은 기병이 91%로서, 신라군의 실질적인 기동군단으로 역할했다. 새로운 군단의 편제였고 새로운 군사력의 운용이었다. 계금당은 신라의 공세적 방어전략을 상징하며, 나아가 삼국통일이 당군의 철수에의해 얻어진 피동적 결과물이 아니라 적극적 투쟁을 통해 쟁취한 역사적 성과물임을 보여준다.

목차

등록된 정보가 없습니다.

참고문헌 (25)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