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질문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한국고대사학회 한국고대사연구 한국고대사연구 51
발행연도
2008.9
수록면
5 - 49 (45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질문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濊系 文化의 분포권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유동적이었다. 초기에는 滿洲 중ㆍ동부와 沿海州 남부, 豆滿江 유역, 咸鏡道 동해안 일대에 걸쳐 있었으나, 初期鐵器時代로 접어들면서 夫餘, 沃沮 등의 정치적 단위로 구분되어 등장한다.
古朝鮮 말기에 예족 집단은 남서쪽으로 더 확산되었으니, 강원 북부의 세력은 臨屯이라는 정치체를 형성했고 일부 세력은 嶺西地域으로 본격적으로 진출해갔다. 예계 문화권의 확대와 변동은 이러한 예족 집단의 확산은 물론 주변 세력과의 교류를 통해서 이뤄졌다. 漢은 BC 75년에 영동지역을 樂浪郡東部都尉가 관할하고 영서는 樂浪郡이 직할하도록 했다. 嶺東濊와 嶺西濊가 分岐하는 계기는 이때 마련되었다. AD 30년에 동부도위가 폐지되었지만 영서지역에 대한 낙랑군의 지배는 유지되었고, 이후 東濊를 高句麗가 복속시키면서 양 지역간 문화적 차이는 심화되어갔다. 凸ㆍ呂字形 주거지, 硬質無文土器와 打捺文土器의 동반 등 주요한 생활문화를 공유하면서도 영서지역에서만 葺石式積石墓가 조영되는 것은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통해서 이해해야 한다.
3세기 중엽 이후로는 漢城百濟가 등장하여 東邊 즉 영서지역의 濊 집단을 복속시켜 나갔다. 百濟土器와 육각형주거지의 확산은 이를 반영하는 현상이다. 그러나 4세기 초에 高句麗가 남하하여 낙랑군과 대방군을 멸망시키면서 정세가 급변한다. 경기 북부와 영서지역을 놓고 백제와 고구려가 쟁패하지만 결국은 고구려가 이 지역을 장악했다. 「廣開土大王王陵碑文」에 보이는 ‘新來韓濊’는 고구려가 확보한 신영역에 韓族만이 아닌 濊族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5세기 초의 고구려인들이 영서지역의 주민을 東濊와 같은 濊系 집단으로 인식했음을 보여준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廣開土大王陵碑文」의 ‘新來韓穢’
Ⅲ. 原三國期 中部地域의 문화양상
Ⅳ. 濊系 文化와 濊族의 分岐
Ⅴ.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79)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이 논문과 함께 이용한 논문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