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질문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문광균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저널정보
호서사학회 역사와 담론 역사와 담론 第90輯
발행연도
2019.4
수록면
163 - 201 (39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질문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제주도는 지질적인 여건상 농사에 적합한 곳이 아니었다. 이런 이유로 수재나 풍재 등 자연재해의 발생으로 제주도에 흉년이 들면 기민이 많이 발생하였다. 18세기 조선정부는 다른 지역의 기민을 구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각도에 교제창을 설치했는데, 이 과정에서 나리포창이 설치되었다. 나리포창은 숙종 46년(1720) 충청도 연기에 설치되었지만 2년이 지난 경종 2년(1722) 제주도 진휼 전담 창고로 그 성격이 변모하였다. 제주에 흉년이 들면 나리포창에 비축되어 있는 곡물을 제주도로 보내주고, 그 대가로 양태와 미역 등의 특산물을 받았다. 그리고 제주 물품을 인근 군현에 판매하고, 그 대금으로 다시 곡물을 구입하여 나리포창에 보관해두었다.
그러나 전근대사회에서 제주도까지 곡물을 수송하고, 특산물을 받아오는 일이란 매우 위험하고도 어려운 일이었다. 또한 특산물을 충청도와 전라도의 여러 군현에 나눠준 다음 곡물을 비축하는 일 또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여기에 관리자의 낮은 지위, 실무담당자의 비리행위, 제주 물품의 출송 지연, 과다한 곡물 이전에 따른 곡물 부족현상 등은 나리포창 운영의 걸림돌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정부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정부는 제주의 기민 구제에 심혈을 기울였다. ‘均是赤子’론적 입장에서 제주도민을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정조 11년(1787) 제주도와 임피를 오가는 선박의 파선 위험을 고려하여 나리포창을 나주 제민창으로 이전하였다. 이와 같이 조선왕조는 나리포창 운영의 정상화를 위해 수차례에 걸쳐 절목을 개정하고 관리체계를 강화해갔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나리포창의 설치 · 이전과 관리실태
3. 나리포창 곡물의 逋欠과 개선 방안
4. 羅鋪補民穀의 신설과 羅州 재이전
5.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18)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

UCI(KEPA) : I410-ECN-0101-2019-911-0006841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