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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채미하 (고려대학교)
저널정보
동북아역사재단 동북아역사논총 동북아역사논총 제56호
발행연도
2017.6
수록면
48 - 91 (4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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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고구려가 건봉 원년, 666년 당의 봉선의례에 참여한 이유와 그 의미를 살펴본 것이다. 666년 정월에 행해진 당의 봉선의례는 주변 국가의 왕족과 사신이 다수 참석한 유례없는 대규모의 의식이었다. 여기에 고구려 복남이 참여하였는데, 신라의 김인문과 백제의 부여융이 함께 당에 들어간 것과는 달리 고구려 복남은 따로 당에 들어갔으며 태산으로 출발하기 전에 당 고종을 알현하기도 하였다.
665년 8월 13일 신라 문무왕이 당의 강압에 의해 백제 부여융과 양국의 영토를 확정지은 취리산회맹은 664년 2월의 웅령맹약이 그 토대였다. 당은 취리산회맹을 통해 백제의 명맥을 유지시켜주면서 신라를 견제하고 고구려 침략의 전초기지를 마련하려고 하였다. 당시 국제정세에 밝은 고구려는 취리산회맹을 저지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복남을 당의 봉선의례에 참여시키기로 결정하였다. 이것은 연개소문의 사망과 연동되어 있는 것으로, 연개소문은 취리산회맹 이전에 사망하였다고 보았다.
취리산회맹은 당이 봉선의례를 준비하는 과정에 있었던 것으로, 취리산회맹을 통해 당은 신라와 백제의 봉선의례 참여를 확정지었고 고구려의 봉선의례 참여를 유도하기도 하였다고 보았다. 따라서 당은 고구려 멸망의 뜻을 분명히 하였지만, 고구려 복남의 봉선의례 참여로 고구려에 대한 무력도발은 철회하려고 하였다. 이것은 봉선의례가 끝나는 시점에서 신라의 청병 요구에 당의 반응이 보이지 않는 데서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고구려 복남의 봉선의례 참여는 고구려가 당에 외교적으로 복속되었다고 한다면 고구려 멸망 후 행해진 당의 개선의례는 고구려가 당에 실제적으로 복속되었음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신라 역시 고구려 멸망 후 개선의례를 행하였는데, 이것은 진덕왕대 이후 신라가 당 중심의 일원적인 세계에 편제되어가는 모습의 일면이기도 하지만,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하였음을 대내외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도 하였다.

목차

Ⅰ. 머리말
Ⅱ. 666년 당 봉선의례 기록 검토
Ⅲ. 고구려의 당 봉선의례 참여 배경
Ⅳ. 봉선의례의 의미
Ⅴ.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초록
ABSTRACT

참고문헌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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