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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갑동 (대전대학교)
저널정보
호서사학회 역사와 담론 역사와 담론 第78輯
발행연도
2016.4
수록면
35 - 70 (3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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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무속 신앙에 대한 기록이 처음 보이는 것은 고려 顯宗때이다. 그러나 이미 태조 때부터 무속 신앙은 존재하였다. 팔관회 등을 통해 자연스럽게 계승되었다. 고려 전기 만을 놓고 볼 때 국가에서는 상례적으로 무당을 모아 비를 비는 祈雨 행사를 벌였다. 고려전기에 무속 신앙이 가장 번성한 것은 仁宗 때였다. 그것은 이자겸의 난, 묘청의 난을 겪으면서 사회가 매우 혼란했던 데에 원인이 있었다. 물론 이에 대한 일부 비판이 있었지만 그 영향력은 크지 않았다.
1170년(의종 24년) 무신란으로 무신 정권이 들어서자 巫俗은 더욱 성행하였다. 무인 집정자들과 무신들의 횡포로 백성들의 생활이 궁핍하게 된 것도 한 원인이었다. 무당들에 의한 기우 행사도 계속되었다. 또한 당시 성행하던 불교와 도교 등이 무속 신앙과 융합되는 현상도 발생하였다. 무당이 불교의 帝釋天을 자칭하기도 하였고 또 신당에 도교의 七元九曜를 같이 모시기도 하였다.
원 간섭기에 들어오면서 무속 신앙은 절정에 이르렀다. 元 나라조차도 무격들을 우대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때로는 왕실의 여러 사건에 무당들이 깊이 개입하기도 하였다. 무당의 친족들이 조정의 고위직을 차지하기도 하였다. 그러자 일부 유학자들은 무속 신앙을 배척하기 시작하였다. 무인 집정자나 왕들이 무당들을 도성 밖으로 쫓아내는 조치도 취해졌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무속을 금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고려 말 공민왕대에 오면 무속 신앙의 폐해가 더욱 커졌다. 무당이 천제석이라 자칭하면서 백성들을 혹세무민하기도 하였고 彌勒佛을 자칭하던 伊金이란 자를 숭배하기도 하였다. 그러자 새롭게 등장하던 유학자인 신진 사류들에 의하여 불교와 함께 심하게 배척받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閔霽 같은 이는 하인이 막대기를 들고 중을 때리는 그림과 개를 시켜 중, 무당을 쫓아내는 형상도를 그려 이를 벽에 붙여 놓기도 하였다. 金子粹나 鄭道傳 등은 불교와 더불어 무속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심지어는 과전법에서조차 무당들이 과전을 받는 것을 금하기까지 하였다. 金貂 같은 이는 무격들을 서울에서 내쫓고 淫祀를 행하는 자는 죽여 용서치 말 것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고려 전기 무속 신앙의 유행
Ⅲ. 무신정권기 무속 신앙과 불교, 도교와의 융합
Ⅳ. 고려 말기 무속 신앙의 성행과 그 비판
Ⅴ.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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