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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양흥숙 (부산대학교)
저널정보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로컬리티 인문학 로컬리티 인문학 제13호
발행연도
2015.4
수록면
53 - 88 (36page)
DOI
10.15299/tjl.2015.4.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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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의주는 國境, 關門 등으로 상징되었다. 국경에 위치하므로 군사적 요충지가 되지만, 청과의 군사적 긴장이 감소되면서 의주는 외교와 무역 기능을 강화할 수 있었다. 의주는 조선과 明?淸 사이의 경계, 여진과 인접해 있는 境界地였다. 또한 국경으로 상징되는 압록강은 민의 이동하는 데 장애물이 되지 못하였으며, 더욱이 압록강 건너편부터 요동의 連山關(또는 鳳凰城) 사이에는 國境線이라고 상징할 만한 통제물이 없었다. 그러므로 의주부터 連山關(또는 鳳凰城)까지는 ‘國境中立地帶’로 이해되기도 한다. 이런 공간적 특성은 조선후기 내내 이어졌다. 민의 이동이 빈번하자, 빈 압록강변의 출입통제를 위해 청에서 군 초소를 세우려고 하였으나 조선에서는 이를 반대하였다. 초소가 생기면 마을이 생기고, 민의 왕래가 더욱 활발해질 것이라는 우려때문이었다. 압록강변을 군인의 감시가 없는 空閑地로 남겨두려고 한 것은, 오히려 민이 경계를 넘는 越境이 단절되지 않는 한 가지 원인으로 제공되었다.
한편 크고 작은 분쟁, 후금 건국,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이 발발하였을 때에는 상호간에 이주민이 대거 발생하였다. 조선전기에도 여진인 마을로 이주하는 조선인, 조선인 마을로 이주한 여진인이 많았던 것과 유사한 양상이었다. 청을 피해 들어오는 漢人(明人)이 이주하고, 이주민의 마을이 생겨나기도 하고, 이들과 결혼하는 의주 사람도 생겼다. 명확하게 보였던 나라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상황이 의주를 비롯한 변방에서 생겨났다.
의주는 조선과 明淸을 오가는 使行路에 또한 위치하였다. 燕京을 오고가는 연행사, 조선에 들어오는 勅行이 의주에 체류하면서 의주민은 청의 소식, 정보, 문화를 접할 수 있었다. 또한 사행 구성원으로 참여하여 직접 淸에 가서 異國을 경험할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柵門後市에서의 거래를 지속하면서, 의주상인과 淸 상인은 신뢰를 쌓을 수도 있었다.
의주는 國境이라는 통제성, 邊方의 주변성, 민의 이동과 여행을 통해 이문화의 수용과 변용이 진행되는 지역이었다. 의주민은 異國 경험과 교류를 반복함으로써 자신의 공간을 확장하고, 異國人과 관계를 심화시킬 수 있었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의주, 장소의 속성
3. 邊方, 모호한 境界
4. 義州民의 異國 경험과 교류
5.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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