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질문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한국미술사학회 미술사학연구(구 고고미술) 美術史學硏究 第255號
발행연도
2007.9
수록면
167 - 196 (30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질문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北響堂石窟 北洞은 중국 河北省 邯鄲市 峰峰?區의 鼓山에 위치한 대형 석굴사원이다. 이 석굴은 북제 초기, 초대 황제인 文宣帝에 의해 수도 鄭城 지역에 조영되었는데 그 규모와 화려한 장염의장 등으로 미뤄 단순한 예배 공간이 아닌 황실의 정치적 기념비로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북동에는 중국의 기타 지역 석굴시원에서는 볼 수 없는 조형적 특징이 출현한다. 즉 석굴 외관이 복발형 지붕을 가진 방형 단층탑 형식의 ‘塔形窟’이라는 점이다. 본고는 이런 조형적 특징의 의미와 그 출현 배경을 석굴의 조영자인 문선제와 관련해 분석, 고찰했다.
먼저 당시의 조상기와 문헌 등을 중심으로 복발형 지붕을 한 방형의 단층탑이 무엇으로 예배 되었는지 살펴보았다. 그 결과 남북조시대에는 이런 탑이 阿育王塔으로 널리 예배되었으며, 이것은 아육왕탑을 예배하면 많은 재액을 멸하고 지옥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관념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즉 아육왕탑은 불교적 상서로 신앙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고대 중국에서 종교적 상서는 종종 정치적 상서로 이용되었으며, 아육왕탑 또한 예외가 아니어서 통치자의 덕을 미화하는 정치적 상서로 이용됐다. 이는 아육왕이 석가모니에게 咐囑을 받은 인도의 전륜성왕이라는 점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러므로 당시에는 아육왕탑이 출현한 곳은 불교적 이상군주인 전륜성왕이 다스리는 불국토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고 梁 무제, 惰 문제 등도 이런 관념을 충분히 이용해 자신이 전륜성왕임을 드러냈다.
북제 문선제도 예외가 아니었다. 菩薩戒 受戒와 그에 이어지는 斷肉禁酒令, 조류와 어류의 방사에서 보듯 아육왕의 행적을 강하게 모방했으며, 또한 자주 定光佛本生談을 흉내 내어 자신이 전륜성왕으로서 태어났음을 세상에 드러내 보였다. 아울러 당시의 조상 명문과 唐代 기록들도 문선제를 비롯한 북제 황제를 전륜성왕에 비유하고 있어 문선제가 당시 전륜성왕으로서 인식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전륜성왕 통치이념이 조형적으로 표현된 것이 다름 아닌 ‘불교적 상서’ 탑형굴의 조영이었을 것이다. 즉 문선제는 이를 통해 자신이 통치하는 국토에 아육왕탑이 출현했음을 널리 알리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탑형굴은 북제에서도 업성 지역에만 출현할 뿐, 북제 황실의 근거지로 실질적 통치 중심지였던 太原의 天龍山石窟에서는 출현하지 않는다. 이는 문선제의 아버지 高歡에 의해 낙양으로 부터 강제 이주된, 북위 황실세력을 포함한 낙양의 40만 호가 업성 지역에 집단적으로 거주하고 있다는 점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 북위의 선양을 받아 북제를 개창한 문선제는 그들에게 위와 같은 불교적 상서의 출현을 통해 자신의 왕조 창업을 정당화하고자 했을 것이다.

목차

Ⅰ. 서론
Ⅱ. 북향당석굴 북동의 조영자 文宣帝
Ⅲ. 북향당석굴 북동의 전륜성왕 상징-塔形窟
Ⅳ. 탑형굴의 ?城 조영 배경
Ⅴ. 결론
국문초록
Abstract

참고문헌 (0)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이 논문과 함께 이용한 논문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

UCI(KEPA) : I410-ECN-0101-2009-609-014730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