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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불교미술사학회 불교미술사학 불교미술사학 제11권
발행연도
2011.1
수록면
7 - 40 (3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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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중국 남북조시대 및 당대 문헌의 비교 분석을 통해 위진남북조시대 아육왕상 전승과 숭배 상황을 연구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아육왕상은 ‘인도 마우리아 왕조의 아육왕이 만든 석가모니상’을 지칭하나, 인도에서 불상의 출현은 1세기가 되어서야 이루어졌으므로 아육왕상의 존재는 후대 불교도들이 만들어낸 전승에 불과하다. 게다가 아육왕상은 한역 불전에도 나타나지 않으며, 현재까지 인도 및 서역에도 알려진 바가 없어 중국에서 창안된 도상으로 생각된다. 때문에 중국의 아육왕상 인식은 단일하지 않으며, 시대에 따라 변화했다. 당대 道宣의 저작인『집신주삼보감통록』에는 대략 7-8건의 위진남북조시대 아육왕상이 집록되어 있다. 그러나 남제 왕염의『명상기』, 6세기 초 梁에서 저술된 보창의『고승전』을 비롯한 남조 문헌에서는 오군의 두 석상, 양도의 장간사상, 형주 장사사상, 여산의 문수사리상 등이 숭배대상으로 언급되어, 당대에 이르러 아육왕상의 수가 증가되었음을 보여준다. 상술한 아육왕상은 적어도 4세기 후반에 이르면 널리 숭배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런 아육왕상 숭배는 4세기 전반의 아육왕탑 신앙의 영향에 의한 것이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아육왕상 숭배가 행해진 네 지역은 모두 남조의 정치, 군사 및 불교의 중심지이다. 북조에서 아육왕상은 남조보다 200년 정도 늦어 6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출현한다. 이는 서위의 익주와 형주 점령이라는 정치적 사건과 관련이 있어 북조 아육왕상 숭배가 남조 영향 아래 출현했음을 보여준다. 상술한 남조의 네 지역에서 나타나는 아육왕상 숭배는 고정된 것은 아니며 시대에 따라 변화한다. 오군의 두 석상은 6세기 초를 기점으로, 그리고 여산의 문수사리상은 혜원이 입적하는 5세기 초를 기점으로 점점 아육왕상으로서 인식이 희미해지고 있다. 반면 양도의 장간사상과 이 상을 모델로 한 형주 장사사의 불상은 6세기 후반 남조의 멸망까지 지속적으로 숭배되었다. 두 상 가운데서도 남조를 대표하는 아육왕상은 남제와 양에서 활약한 僧祐의 글에서 보듯 도성 장간사에 봉안된 금상이었다. 그러나 당대 도선의 기록에서는 오히려 형주 장사사상을 우위에 두고 있어, 불교 사적을 집록한 문헌 연구에서 신중함이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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