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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한국문화사학회 문화사학 文化史學 第18號
발행연도
2002.12
수록면
29 - 69 (41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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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이천의 설봉산성에서 唐 懿宗代의 年號 咸通(860~873, 헌안왕 4년~경문왕 13년) 등이 새겨진 箕形石硯이 출토되었다. 箕形硯은 隋唐代를 대표하는 형태이고, 銘文이 당시 신라에서 사용되던 行書體인 것 등으로 보아 신라에서 사용되었던 것임에 틀림없다.
銘文은 긁힌 자국이 많아 정확한 판독은 어렵다. 銘文은 年號와 千支 年月日이 대부분이다. 銘文의 시작 부분에 나타나는 「回ㅑ」는 글자가 아닌 문단의 시작 부호로 판단되며, 「寺下家흑」의 ‘寺’는 官府에 해당된다고 하겠다. ‘흑’은 현재 사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康熙字典』에도 없는 글자라서 人名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된다.
南朝의 圓形 多足硯은 硯面 둘레에 얇게 둘려진 硯池가 있어 먹이 한 곳에 모이지 않는다. 그러나 北朝의 箕形硯은 硯首를 좁혀 硯池를 깊게 하고, 硯面과 硯池 사이에 분리벽이 세워져 硯池의 용량을 늘리도록 설계되었다. 이러한 北朝의 箕形硯은 硯面과 硯池面의 기울기를 달리하기도 하고, 硯池의 용량 확보를 위해 箕口에 다리를 세워 硯池面을 낮추기도 하고, 硯堤의 曲律을 줄여 삼각형 구도로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또 硯池 용량을 더 늘리기 위해 硯首의 폭이 점차 넓어지면서 벼루는 長方形으로 발달하여 오늘날의 長方形 벼루의 형태에 이르게 되었다. 이로 보면 咸通銘벼루는 箕口가 넓은 箕形硯에서 長方形 벼루로 바뀌는 康代 箕形硯의 마지막 단계의 형태에 속한다고 하겠다.
고분 벽화와 출토 유물에 나타나는 우리 나라의 벼루가 圓形足硯 계열인 것으로 보아 중국 南朝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겠다. 그러나 설봉산성의 咸通銘벼루와 포천군 반월산성에서 출토된 통일 신라말의 箕形 陶硯과 원주 法泉寺址의 箕形硯, 고려 시대에 속하는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箕形硯만이 北朝에서 발전된 형태인 箕形을 나타낸다. 이로 본다면 成通銘벼루는 지금까지 우리 나라에서 출토된 箕形벼루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이다.
咸通銘벼루가 출토된 이천 지역은 삼국이 대립하던 접경 지역으로, 매우 중요한 전략적 지점이었다. 이천 지역은 삼국 통일 이후 對唐 교역을 통해 경제력이 급성장하면서 점차 豪族 세력이 형성되는 경제적 지역으로 되었다. 王建一家가 浿江 以北을 근거로 세력을 형성하였지만 浿江 以南 즉, 漢山 지역은 對唐 交易의 交通路로서 지역 세력을 형성하며 浿江 以北과 상호 대립하였다. 그러나 신라가 망하고 도읍이 경주에서 개경, 그리고 한성으로 옮겨진 고려에서 조선시대까지 경제력이 급속히 약화되었다.
咸通銘벼루가 출토된 바로 아래서 唐에서 수입된 해무리굽 백자가 출토되었다. 이는 徐氏 등 이천 지역의 세력들이 사용했던 唐의 수입품들이었을 가능성도 크다. 즉 咸通銘벼루는 당시 이천 지역이 갖는 對唐 교역관계를 포함한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하겠다.

목차

요약
Ⅰ. 서론
Ⅱ. 咸通銘벼루의 형태와 銘文
Ⅲ. 중국 벼루의 특징과 변천
Ⅳ. 고려 이전의 우리 나라 벼루
Ⅴ. 결론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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