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문광균 ((재)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저널정보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동방학지 동방학지 제208호
발행연도
2024.9
수록면
115 - 144 (30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조군(漕軍)은 조선시대 지방의 세곡을 운송하는 조운제도의 주체였다. 조선전기 선군(船軍)에서 수군(水軍)과 함께 분화된 조군은 조운선에 승선하여 국곡 운송이라는 막중한 국역을 맡았다. 정부는 국역에 대한 대가로 보인(保人)과 복호(復戶)를 지급하여 그들의 노고를 보상하고 생계를 보존해주고자 했지만, 칠반천역(七般賤役)이라는 사회적 차별과 함께 세곡운송 과정에서 발생하는 여러 문제로 인해 조군은 고역에 시달리게 되었다. 두 차례의 전란이 끝난 17세기 전반 조군의 입역방식은 크게 변화하였다. 사선을 통한 세곡의 직상납(直上納)이 그 요인 중 하나였지만, 무엇보다 인조대 실시된 호패법으로 조군액이 감액된 것이 결정적이었다. 또한 산간지역 조군과 연해읍 조군의 역 부담 불균도 조군 내부의 갈등을 야기시켰다. 조군이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되자 김홍욱, 유형원, 소두산 등 중앙관료와 재야 지식인들은 조군역의 부담을 완화하여 조운제도를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여러 대책들을 제시하였다. 여러 대안들이 제시되었으나, 17세기 후반까지 별다른 진전을 보이지 못했다. 조군 입역에 대한 문제는 숙종대 추진된 양역변통논의의 과정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되었다. 정부는 1703년(숙종 29) 양역이정청(良役釐正廳)을 설치하고, 전국의 양역을 변통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이때 전라도사로 해운판관을 겸직하고 있던 권이진은 조군의 입역을 전면 폐지하고, 조창 인근의 사람에게 급료를 주어 일을 시키는 조군의 고립제(雇立制)를 제시하였다. 이듬해인 1704년(숙종 30) 정부는 권이진이 제시한 조군역 혁파와 고립군 운영을 골자로 하는 「조선변통절목(漕船變通節目)」을 제정하였다. 「조선변통절목」은 조군으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시행 초기에는 고립군이던 사공과 격군의 부실 등의 문제가 발생했지만, 정부는 이러한 문제마저 불식시키고자 지속적으로 충청도와 전라도의 감사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절목을 보완해갔다. 그 결과 18세기 전반부터 조군의 고립화를 통한 세곡운송은 안정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 18세기 전반 단행된 조군역의 혁파와 고립군 운영은 19세기 후반까지 조운제도 운영의 한 축으로 기능하였다.

목차

등록된 정보가 없습니다.

참고문헌 (0)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