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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오상학 (제주대학교)
저널정보
제주학회 제주도연구 제주도연구 제61권
발행연도
2024.2
수록면
239 - 266 (28page)
DOI
https://doi.org/10.47520/jjs.2024.6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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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정의현의 읍치는 최초 지금의 성산읍 고성리에 설치되었다가 1423년 현재의 성읍마을로 이설되었다. 읍성의 축조는 추운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5일만에 이루어진 역사(役事)였다. 서문, 동문, 남문의 3문 구조로 되어 있고 T자형의 가로망 형태를 띠고 있다. 북쪽에는 주로 관아 건물이 남쪽에는 민가가 들어서 있었다. 정의현 읍치의 입지를 결정하는 요인으로는 위치 요인, 용수 요인, 군사적 요인, 풍수지리적 요인 등을 들 수 있다. 이전 고성리의 읍치가 동쪽으로 너무 치우쳐 있어서 고을의 중앙부에 위치한 진사리로 옮기게 되었다. 또한 중산간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용수가 비교적 풍부했다. 아울러 내륙에 위치해 있어서 해안보다 외적의 침입을 덜 받고 풍수상으로도 한라산의 기맥이 이어지는 명당에 위치하고 있다. 정의현은 고을의 읍격이 상대적으로 낮기 때문에 제주목처럼 다양한 관아 건물보다는 객사, 동헌을 비롯한 향청, 질청, 군사들이 근무하는 청사 등이 축조되었다. 객사와 동헌의 위치 변동은 거의 없었던 것 같고 다른 관청 건물의 위치 이동은 계속 이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으로 볼 때 관아 건물의 배치는 동서 가로망의 북쪽에 있었고 중앙에는 왕권을 상징하는 객사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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