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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최기준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저널정보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한국문화연구 한국문화연구 제43권
발행연도
2022.12
수록면
73 - 113 (41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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孝宗(r.1649~1659)은 ‘병자호란’ 이후 무너진 국가 질서를 재건해야 한다는 과제를 안고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국가 재건이라는 과제를 수행하기에 효종이 처한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효종 즉위 직후 김자점에 대한 탄핵 여론이 들끓었는데, 이는 仁祖(r.1623~1649)의 정치 유산을 청산해야 한다는 요구가 분출된 결과였다. 김자점은 인조의 부정적인 정치 유산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존재 로, 당시 대다수 士類의 公敵과 다름없었다. 효종으로서 집권 초기 김자점을 제거한 다면, 사류의 지지를 끌어낼 수 있었다. 문제는 효종 자신이 인조의 주도 아래 전개된 정치 파동의 결과 왕위에 올랐다는 점이었다. 김자점은 효종의 정통성 문제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강빈 옥사’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런 만큼 효종은 정치적 파장을 고려해 다양한 경우의 수를 대비하여 김자점을 처분해야 했다. 효종은 ‘公論의 수용’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김자점을 축출했지만, 김자점을 명목상 선왕 인조의 功臣으로 남겨두었다. 이를 통해 김자점 처분 논의가 인조 연간의 문제로 비화하는 것을 차단하려 했다. 하지만, 1650년 사문사 파동의 결과 김자점에 대한 효종의 인식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김자점이 청나라를 끌어들여 조선을 위험에 빠뜨리려 했다는 풍문에 기초해 대다수 여론이 김자점을 역적으로 규정했으며, 효종 역시 김자점에 대한 근거 없는 비난과 처벌 요구를 사실상 방조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결국, 효종은 1651년 12월에 김자점을 대역죄로 다스렸다. 이 과정에서 효종은 김자점을 극악무도한 역신으로 몰아세우면서도, 그가 선왕 인조의 공신이었다는 점을 부각했다. 효종의 양면적인 태도는 ‘역적 김자점’이라는 프레임 이 선왕 인조 대로 소급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효종의 바람과 달리 ‘역적 김자점’이라는 프레임에 기초해 강빈 옥사가 조작되었다 는 주장이 본격적으로 제기되었고, 나아가 강빈을 伸冤해야 한다는 논의가 일었다. 김자점을 처분한 후 효종은 자신의 정통성 문제와 얽혀있었던 강빈 옥사가 다시 들추어지는 상황에 대하여 비상한 조치가 필요했다. 1654년 ‘김홍욱 옥사’는 강빈 옥사에 관한 再論을 주장할 시 逆黨으로 규정해 처분할 수 있음을 공식적으로 선언한 사건이었다. 이를 통해 효종은 자신의 정통성을 위협할만한 논의를 수면 아래로 한동안 가라앉힐 수 있었다. 하지만, 효종의 언론관은 대다수 신료의 비판에 직면했으며, 정통성에 관한 시비 역시 언제든지 수면 위로 올라올 여지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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