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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박준형 (인하대학교)
저널정보
국제비교한국학회 비교한국학 비교한국학 Comparative Korean Studies 제23권 제3호
발행연도
2015.1
수록면
23 - 56 (3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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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청일전쟁 이후 일본인의 평양 진출과 함께 시작된 평양성 내에서의내외국인 간 ‘잡거’가 어떠한 경위를 통해 ‘분거’로 전환되었고, 또 그와 같은전환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를 고찰해 본 것이다. 일본인이 평양에 본격적으로 거류하기 시작한 것은 청일전쟁 때의 일이다. 당시 평양은 아직 개방되지 않았기 때문에 조약상 외국인이 거주할 수 없는 ‘내지’에 해당했으나, 일본이 우세를 점한 전시 상황은 불법을 용인하도록 만들었으며, 일본이 전쟁에서 승리함에 따라 일본인들의 불법 거주는 더욱 증가해 갔다. 일본인들은 장기적 안목에서 상거래를 위한 새로운 활로를 개척하기보다는 한국인의 시장 네트워크를 이용하여 단기적 이익을 취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초기의평양 거류 일본인들은 북성, 내성, 중성, 외성으로 이루어진 평양성 중 한국인들이 집주하는 내성 내 요처를 구매하여 한국인들과 ‘잡거’하기를 택하였다. 한국정부는 1898년 5월 군산, 마산, 성진의 개항과 함께 평양의 개시를 예고했으나, 이듬해 5월에 개방된 3개 항구와 달리 평양에서는 개시구역 설정 문제를 둘러싸고 한국정부와 각국대표 사이에 이견이 지속되었다. 이에 주한외국사신단은 평양 전체를 잡거 가능한 개시구역으로 간주한다는 일방적인 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이후에도 개시구역 설정을 위한 협의는 있었으나 끝내 합의를 보지는 못하였다. 결국 평양은 개시구역 없는 개시 상태가 되었고, 따라서 ‘잡거’ 범위는 더욱 확대되어 갔다. 그러나 러일전쟁 발발 이후 위와 같은 ‘잡거’ 기조는 ‘분거’로 변화되었다. 평양의 외성 일대 전체를 군용지로 수용한 일본군은 군사 시설의 건축과 함께군수품의 안정적인 공급을 위한 시가지 건설을 기획하였다. 일본의 외교 당국또한 내성 내 집값 상승과 위생상의 문제 등을 들어 내성 지역과 떨어진 곳에일본인을 위한 신시가의 건설을 촉구하였다. 결국 신시가의 건설은 일본 화족오카베의 ‘對韓經營’ 사업의 일환으로 착수되었는데, 그의 ‘대한경영’ 속에 한국인은 부재하였다. 이와 같은 경위로 신시가는 중성에 들어섰고, 내성 일대는 구시가로 불리게되었다. 신시가의 도로에는 일본식 명칭이 붙여졌고, 일본인 위주의 사회가 형성되어 갔다. 그러나 그러한 ‘분거’를 통해 일본인과 한국인 사이의 반목이 해소될 수 있던 것은 아니다. 폭력적인 지배의 현실은 일본인들에게 한국인에 의한보복의 두려움을 안겨 주었고, 그와 같은 불안은 경계 밖 ‘적’과의 항시적 동거상태를 만들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잡거’와 ‘분거’에 대한 대립적인 접근 방식의 재검토를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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