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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양지선 (독립기념관)
저널정보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한국민족운동사연구 한국민족운동사연구 제107호
발행연도
2021.1
수록면
43 - 79 (37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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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남만주 한인사회를 기반으로 창설된 조선혁명군은 1931년 일본의 만주 침공을 계기로 조직된 중국 의용군과의 연대를 시도하였다. 오랫동안 한국혁명세력과 유대관계를 맺어 온 왕통쉔과 함께 요녕민중자위단을 조직해 활동하였으며, 이후 세력 확대를 위해 다시 대도회를 이끌던 량시푸에게 연대를 제안해 요녕농민자위단을 결성하고 활동하였다. 한편, 1931년 일본이 만주를 침공하자, 베이징에서도 동북항일민중구국회가 조직되었으며, 탕쥐우를 방어군 단장으로 추대하였다. 동북항일민중구국회는 중국 만주에서 활동하는 한국혁명단체에 특파원을 파견해 완전한 연대를 이루고 대일항일투쟁 및 한국경내에 대한 진공작전 등을 추진하였다. 요녕민중자위군을 결성한 한중의 혁명세력은 1933년 4월 용링제전투, 7월의 콰이다마오즈 전투 등 일본군과 싸워 큰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일본의 침략이 더욱 거세지며 요녕민중자위군은 점차 고립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총사령 탕쥐우가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관내로의 이동을 결정하면서 요녕민중자위군의 활동은 사실상 중단되었으며, 조선혁명군은 원래의 이름을 회복한 뒤 독자적 활동을 재개하였다. 요녕민중자위군 마저 활동을 중단한 뒤 조선혁명군은 더욱 큰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한인사회는 물론 중국 측 지원 역시 끊기자 일본의 추격과 공격을 피해 깊은 산골짜기나 동굴 속에 은신하면서 나무껍질과 풀뿌리로 연명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립에 대한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하지만, 일본과 만주국의 거듭되는 대규모 포위공격으로 사실상 붕괴 위기에 처했다. 결국 이를 타개하기 위해 관내로의 이동을 결정하였고, 그 가운데 일부는 중국공산당 계열인 동북항일연군에 합류해 항일투쟁을 계속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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