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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백종오 (한국교통대학교)
저널정보
한국고대학회 선사와 고대 선사와 고대 제61호
발행연도
2019.1
수록면
5 - 27 (23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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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고는 단양 적성의 현황과 조사 성과를 토대로 6세기 중반 적성은 어떠한 경관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살펴본 것이다. 이는 그 동안 막연히 ‘赤城(碑)=新羅(6世紀)=石築山城’이라는 공식이 과연 합당한지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되었다. 일반적으로 한반도의 중부지역인 임진강에서 한강과 금강, 그리고 소백산맥 일대에 분포한 신라 석축산성의 대부분은 6세기 중반에서 7세기 중반에 쌓은 성들로 알려져 있다. 이것은 문헌기록에 근거한 산성의 위치 비정과 단양 신라 적성비가 가장 큰 역할을 하였다. 그 중심에 報恩 三年山城과 丹陽 赤城이 있다. 이와 관련해 明活山城 作城碑(551년)와 南山新城碑(591년)가 참고된다. 이들 축성비는 토축산성에서 석축산성으로의 변화 시점에서 석축산성의 유지 관리에 목적을 두고 세워졌다는 점에서 무엇보다도 큰 의미가 있다. 이를 통해 명활산성 작성비와 남산신성비가 세워지는 6세기 중후반 들어 경주 분지를 둘러싸고 명활산성 석축구간 신축과 남산신성 신축, 서형산성 수․개축 등 경주의 동쪽과 남쪽, 서쪽 등에 석축산성이 축조되면서 왕경 방어체계가 완성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또 이로보아 지방 거점성의 石築化는 7세기 이후, 석축산성은 7세기 중반 이후에나 가능하지 않았을까 한다. 그리고 단양 적성의 최근 시굴 결과, 토축 성벽이 일부 확인되었고 육안상으로도 토루의 흔적이 관찰되고 있다. 초축 당시에는 토축산성일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현재의 석축산성은 7세기 중반에 이루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이를 반증하듯 보은 삼년산성의 경우, 남벽 내측구간 2개 지점에서 판축토루가 발굴된 바 있고 옥천 이성산성도 서벽부 판축토루와 외벽의 외면만 석축으로 개축(토심석축)한 사례가 있다. 물론 강릉 강문동 토성, 양산 순지리토성 등도 그 예에 속한다. 따라서 6세기 중반의 단양 적성은 토축산성의 전경과 함께 동벽부에 인접하며 죽령과 마주한 적성비를 연상할 수 있게 되었다. 향후 신라 토축산성 및 석축산성의 5세기 후반에서 7세기 중반에 걸친 축성방식에 대한 계보적인 정리가 필요하며 이에 대한 연구가 심층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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