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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박규철 (국민대학교)
저널정보
중앙대학교 중앙철학연구소 철학탐구 철학탐구 제63집
발행연도
2021.8
수록면
29 - 51 (23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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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산체스는, 몽테뉴와 더불어, 르네상스 시기 위대한 피론주의자다. 그는, 피론주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고대의 의학적 경험주의’와 ‘아카데미 학파의 회의주의’를 융합시키고자 하였다. 『아무 것도 알 수 없다는 것(Quod nihil scitur)』라는 그의 저서에는 철학적 융합의 정신이 잘 드러나 있다. 필자는 ‘최초의 르네상스 회의주의자’로서 F. 산체스를 다음 3가지 관점에서 고찰하였다.
첫째로, F. 산체스의 회의주의를 구성하는 첫 번째 기둥은 ‘피론주의’다. 그는 르네상스 회의주의의 역사에 있어 위대한 피론주의자였다. 하지만, 다른 피론주의자들과 달리, 아카데미 학파의 회의주의나 의학적 경험주의를 수용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그의 이러한 도전정신으로 인하여, 르네상스 회의주의는 발전하였다.
둘째로, F. 산체스의 회의주의를 구성하는 두 번째 기둥은 ‘고대의 의학적 경험주의’다. 그는 의학적 경험주의에 기반 해서 ‘철학적인 것과 의학적인 것’의 결합은 시도하였다. 그가 가진 회의주의적 태도는 모두 의학연구 및 의료 행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그의 회의주의는 섹스투스 엠피리쿠스와 메노도토스의 고대 의학적 경험주의의 전통에 서 있었다.
셋째로, F. 산체스의 회의주의를 구성하는 세 번째 기둥은 ‘아카데미 학파의 회의주의’다. 그가 아카데미 학파의 회의주의로부터 받았던 지적 영향은 『아무 것도 알 수 없다는 것』에 잘 드러나 있다. 여기에서 그는 자신의 ‘무지’를 주장하였으며, 나아가 그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조차 알지 못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점에서, 그의 회의주의는 ‘무지’를 고백하였던 소크라테스와 ‘무지의 무지’를 강조하였던 아르케실라오스의 전통에 서 있었다.
결론적으로, F. 산체스는 몽테뉴와 함께 르네상스 회의주의를 견인하였다. 몽테뉴가 신앙주의와 회의주의의 융합을 지향하였다고 한다면, 산체스는 피론주의와 의학적 경험주의 그리고 아카데미적 회의주의의 대(大)융합을 지향하였다. 그의 이러한 노력으로 인하여, 서구 회의주의의 지평은 확장될 수 있었다. 이런 점에서, 그는 ‘심오한 근대적인 사상가’이기도 하였다.

목차

요약문
1. 머리말
2. F. 산체스의 회의주의 안에서 의학적 경험주의 전통과 인식론적 경험주의 전통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3. 왜 F. 산체스는 위대한 피론주의자로 불리는가?
4. 신아카데미 학파의 회의주의는 F. 산체스의 피론주의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5. 맺음말
참고 문헌

참고문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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