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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최진아 (한양대학교)
저널정보
비교민속학회 비교민속학 比較民俗學 第72輯
발행연도
2020.10
수록면
101 - 128 (28page)
DOI
10.38078/ACF.2020.10.7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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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조선시대 성저십리 내 금성당의 지리적 의미와 한양굿 유파와의 관련성을 통해 종교적 성소로서 문화사적 위상을 살펴보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금성당은 세종대왕의 아들인 금성대군을 모신 당이다. 조선후기 금성대군을 모신 성소로 환치되었을 것으로 보이며, 이전에는 나주 해상세력에 의해 나주 금성산의 산신을 위한 성소였을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조선시대 금성당은 구파발(진관동) · 노들(망원동) · 각심절(월계동) 이 세 곳에 존재하였으나, 현재는 구파발의 금성당 만이 남아있다. 금성당은 조선시대 왕도의 성역으로 여겨지던 성저십리에 존재하였다. 성저십리에 금성당이 존재했던 이유는 국가가 무격을 사대문 밖으로 축출하려했던 정책과 무관하지 않다고 볼 수 있다. 금성당 주변으로는 죽음의 공간과 무격거주촌이 공통적으로 위치해 있었으며, 이 외에 활인서가 위치해 있었다. 죽음의 공간은 공동묘지, 사형 집행지, 화장터를 말한다. 무격은 국가정책에 의해 활인서에 근무하였으며, 그 인근에 무격거주촌이 형성되었다. 즉, 무격들은 사대문 안 소비층과 죽음의 공간에서의 죽음의례 소비층을 위해 그 주변부에서 모여 살면서 무업활동을 하였다.
한양굿 세 유파의 전통은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 세 유파는 오만수라는 무조(巫祖) 하의 네 신딸과 관련된다. 이 중 하나는 양씨부인으로 덕물산의 무전통을 세웠고. 다른 세 명의 신딸은 구파발본 · 노들본 · 각심절본을 만들었다. 이 세 유파는 조선시대 금성당이 존재하였던 위치와 동일하다. 사대문 밖 축출로 인해 성저십리 주변에 모여 살던 무격에게 죽음의 공간과 무격거주촌 인근에 위치한 세 곳의 금성당은 자연스럽게 유파의 근본이 되는 성소로서 자리매김하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무속제의를 행할 때는 해당 지역의 지역신을 가장 먼저 초대하여 고하는데, 한양굿에서는 수풀당 다음으로 금성당이 가장 많이 불려진다. 일제강점기 조사에 의하면 민간에서는 해당 금성당 주변까지도 성지로 여겨지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한양굿 무격은 개성의 덕물산에 예탐(豫探)을 하러 가야 할 때는, 먼저 금성당에 들른 뒤에 개성으로 향하였다. 혹은 개성까지 가지 못한 이들은 덕물산을 대신해 금성당에서 예탐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양굿 세 유파와 덕물산의 양씨 부인이 동기간이라는 점에서 덕물산과 세 곳의 금성당을 동일시했을 가능성을 제기해 본다. 또한 조선후기 〈궁중발기〉에 의하면, 금성당은 왕실에서 정기적으로 시주를 하며 기복발원을 기원하는 등 별기은을 위한 기도처 중의 하나였다. 이와 같이 금성당은 무격의 본향임과 동시에 다양한 무속 소비층을 위한 종교공간으로서 그 인근까지도 신성시되었다는 점에서, 성저십리 내에서 무격과 신앙자들 모두에게 커다란 영향력을 미치는 종교적 성소로 여겨졌다고 볼 수 있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조선시대 금성당의 지리적 위치가 갖는 의미
Ⅲ. 한양굿 세 유파와의 관련성 및 예탐과 발원의 성소
Ⅳ. 맺음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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