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질문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윤태양 (서강대학교)
저널정보
서강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서강인문논총 西江人文論叢 第58輯
발행연도
2020.8
수록면
71 - 119 (49page)
DOI
10.37981/hjhrisu.2020.08.58.71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질문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이 글에서는 毗有王(재위 427~455) 대 백제의 對倭 외교의 역동적 변화상을 살피고자 하였다. 비유왕대는 이른바 ‘倭 5王’에 속하는 珍・濟가 宋과 교섭한 시기이자, 왜국 왕이 송에 使持節 都督倭・百濟(이후 加羅)・新羅・任那・秦韓・慕韓 6國諸軍事 安東大將軍 倭國王이라는 몹시 독특한 형태의 官爵을 제수하기를 요청하였던 시기이기도 하다. 도독6국제군사호는 438년 시점에는 왜국왕이 自稱한 것에 불과하였지만, 451년에는 일부 수정을 거쳐 끝내 송으로부터 왜국왕에게 실제로 수여되었다. 필자는 이러한 왜국의 도독6국제군사호가 백제・왜국・송 3국 사이에서의 잦은 교섭과 협의를 거친 결과물일 가능성을 제시하고, 신라를 비롯한 한반도 남부와의 역동적인 관계 속에서 당대의 시대 분위기를 설명하려 하였다.
438년에 최초로 왜왕 진이 도독6국제군사호를 요청할 당시, 이는 왜국이 將軍號를 제수하여 자국 내에서의 지방 지배력을 강화함과 동시에 독자적으로 한반도 지역과 접촉할 명분을 만들기 위한 개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외적인 소란에 휘말리는 일을 막고자 하였던 백제는 이에 대해 440년대 송에 대한 사절 파견을 통해 왜국이 도독 6국제군사호를 수여받을 여지를 없앴을 것으로 보았다. 이로 인해 왜국의 외교는 실패하였고 백제와 왜국의 관계는 냉각되었을 것이며, 酒君 사건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450년을 전후한 시기에 백제는 馮野夫로 대표되는 중국계 유이민과 木氏 세력을 이용하여 자국의 남방 영역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려 하였던 것으로 보았다. 이와 함께 백제는 이들 세력을 매개로 한반도 남부와 왜국의 “軍・郡”에 해당하는 유력자의 교섭을 주선하였으며, 필자는 두 나라 사이에 이러한 합의가 이루어진 결과물이 451년 도독6국제군사호의 수정・승인이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더 나아가 왜왕 제가 사망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459년 전후까지, 이러한 교섭의 형태는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되었을 것으로 보았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430~440년대 百濟·倭의 동향과 都督6國諸軍事號 문제의 발생
3. 450년 전후 西河太守職의 의미와 도독6국제군사호 문제의 소강
4.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0)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이 논문과 함께 이용한 논문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