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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박수정 (고려대학교)
저널정보
신라사학회 신라사학보 신라사학보 제47호
발행연도
2019.12
수록면
99 - 138 (4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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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덕왕대의 관제개혁은 중앙집권적 정치체제를 지향한다는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관명을 중국식으로 개칭하는 형태를 취하였다. 이것이 혜공왕대 복고되었다 하더라도, 이후에 중국식 명칭이 계속해서 혼용되는 모습이 보인다는 점에서, 제도사적인 측면에서는 경덕왕대 관제개혁이 이후에 미친 영향이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원성왕대 이후 그러한 경향이 더욱 두드러졌을 것이라 생각되며, ‘내성시랑’, ‘수성부령’은 이를 직접적으로 증명해 주는 자료이다.
9세기 전반에는 이미 중앙관제와 지방관제에 눈에 띠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이는 어룡성의 설치와 집사성의 승격, 중국식 명칭 사용례의 증가 및 새로운 관제의 채택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역시 기본적으로는 경덕왕대 시행되었던 관제개혁의 기조와 그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그동안 이른바 2차 관제개혁의 의미가 강조되었던 상황에는 8세기 말~9세기 초의 관제와 9세기 중 · 후반의 관제 사이에 큰 변화가 있었다는 인식이 깔려 있었다. 그리고 이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서 논의가 집중되었던 관부가 세택(중사성)이었다. 그러나 세택의 경덕왕대 개칭명 중사성이 9세기 후반에 다시 사용되는 점, 8세기 세택의 직장을 잡역으로 한정시키기 어렵다는 점, 세택(중사성)의 중심 직장은 궁궐 내 제반 업무를 담당하고 왕명을 전달해 內外를 이어주는 近侍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점 등에서, 두 시기 사이에 세택(중사성)의 성격 · 위상에 큰 변화가 있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다만 이 관부가 애장왕대 어룡성 시치와 함께 그 소속이 변경되었다는 점은 주목되어야 한다. 어룡성은 왕의 출입시종을 장악하기 위해 설치되어 섭정부로서 기능하였고, 여기에 경덕왕대부터 이미 中事즉 국왕 보좌를 위한 여러 제반 사항을 관장해 왔던 세택(중사성)을 소속시켜 근시의 역할을 수행하게 했던 것이다. 그리고 헌덕왕 즉위 후 어룡성이 冗官化되자 중사성의 이러한 직장은 더욱 부각되었을 것이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경덕왕대 관제개혁의 의미와 그 영향
Ⅲ. 9세기 전반 관제 변화의 양상
Ⅳ. 어룡성의 置廢와 세택(중사성)의 부상
Ⅴ.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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