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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한국불교미술사학회 강좌 미술사 강좌 미술사 제32호
발행연도
2009.1
수록면
145 - 177 (33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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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는 802년에 창건된 화엄종찰로 대적광전에는 1729년 조성의 영산회상도가 있 었는데 현재는 해인사 성보박물관에 이전되어 있다. 이 영산회상도의 원래 봉안처에 대해 서는 화기에 기록이 없고, 또한 1695부터 1871년까지 일어난 7번의 화재로 장경각을 제외 한 모든 전각들이 차례로 소실되어 현재로써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조선후기에는 『법화경』의 기복적 성격과 다른 종파와 통합될 수 있는 성향이 당시의 사회적 요구에 부합하며 법화신앙이 성행되었고, 『법화경』을 도설화한 영산회상도 역시 많은 수가 조성되었다. 이런 배경에 의해 조성된 <해인사 영산회상도>는 임진왜란과 병자 호란 등의 전란으로 인한 혼란을 극복하며 사회적·정치적 안정을 꾀하던 인조·숙종대 (1623~1724)를 지나, 사회·정치적 안정을 되찾고 문예부흥기를 맞이하는 영조·정조대 (1725~1800)의 서막을 여는 작품으로 조성에 참여한 화원과 화면상에 펼쳐진 구도, 표현 기법 등을 고려해 볼 때 이 시대 영산회상도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해인사 영산회상도>의 연구를 통해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양식이 복합적으 로 보이고 있어 불화에 보이는 다양한 양식의 표현과 시대적 영향관계 등에 대해 고찰해 볼 수 있었다. 또한 화기의 시주질 분석을 통해 승려들의 적극적인 시주로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었고, 승려들의 법명 앞에 적힌 ‘通政’이나 ‘嘉善’같은 관직명은 당시 유행한 공명 첩 발행과 관계되는 것으로, 이는 곧 승려의 사유재산 소유를 의미한다는 것도 살필 수 있었 다. 이러한 사유재산의 소유는 승려들의 계(공동모금)의 활동 또한 이끌어 내는 동력이 되 었고, 이를 통해 조선 후기 사찰의 불사 형태의 배경을 파악할 수 있었다. 또한 화기를 통해 수화원 義謙스님이 이 불화를 조성할 당시 ‘붓의 신선(毫仙)’이란 칭호로 불렸음을 확인 하였다. 이는 당시 義謙스님의 화법이 정점에 올라 신선에 비견될 수 있을 만큼 뛰어남을 말 하는 것으로, 義謙스님이 이전에 조성한 다른 불화들과 비교하여 봤을 때 <해인사 영산회상 도>에 보이는 뛰어난 색감각과 화려한 문양, 세밀한 필선 등으로 해서 불려진 칭호로 생각 되며, 義謙의 화격을 보다 잘 설명해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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