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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한국불교미술사학회 강좌 미술사 강좌 미술사 제38호
발행연도
2012.1
수록면
119 - 148 (3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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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조선후기 전반기(광해군~경종)에 해당되는 불화들을 조사하여 현황과 도상별 특징들을 살펴보고, 해당 작품의 화기들을 분석하여 그 시대의 불화 조성의 배경에 대해 밝힌 것이다. 조선후기 광해군~경종대 현존하는 불화들은 현재 70여점 남아있으며 그중에서 약 32점이 괘불도이고, 나머지는 불전 봉안용 불화로 제작된 것이다. 현존하는 이 시기 불화들은 지역에 따라 뚜렷한 시간의 편차를 두고 제작되었다. 이를테면 18세기 이전에는 중부지역을 중심으로 주로 괘불화가 제작되었고, 17세기 말 18세기초에는 영남지역의 불화제작이 집중되어 있었다. 호남지역은전 시기에 걸쳐 고르게 제작되는 양상을 보이지만, 송광사, 화엄사, 흥국사와 같은 대찰을 중심으로 대규모 불화 불사가 진행되었다. 괘불화의 제작은 수륙재와 같은 천도의식이 민간에서도 빈번하게 설행되면서 제작된 것인데, 일단 한번 제작되면 규모, 비용 등에서 다시 조성하기 쉽지 않았기 때문에 중부지역에서 조성된 17세기 후반기 괘불화는 그 이후까지 사용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영남지역의 불화불사는 17세기 후반~ 18세기에 한정된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17세기 후반 중부지역의 불화조성이 크게 줄어들고,불교계의 새로운 거점으로서 영남지역에서의 불화제작이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불화 시주층의 변화도 뚜렸이 나타난다. 무엇보다도 승려들이 시주가 크게 증가하여 그중 일부는승려 시주자가 민간인보다 그 수에 있어서 앞서고 있다. 이는 사찰 내 승려들의 계조직과 같이 조직적이고 적극적인 경제활동을 통해 승려들의 사유재산이 늘어났던 것과도 관련이 있다. 한편 조선 전기부터 불교와 일정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사당, 거사 집단의 성격과 위치의 변천과정을 조선 후기불화의 화기를 통해서 알 수 있었다. 이들은 사찰 내 소속되어 불사를 장려하고 시주금을 받으러 다니는 화주를 맡아 조직적으로 활동하였다. 불사의 조직 일원이던 이들은 점차 개인 신분으로 전환되어 개별적 시주자로 변화하였다. 용문사 목각탱의 화주를 맡았던 이신원거사는 이후 인권 대공덕주로 영향력을 보였지만 노년에는 승려들의 화주활동을 지원하는 역할로 의 화기 등재의 추이를 통해알 수 있었다. 또한 시주층의 변화에는 조선 후기 불교계를 주도하던 고승들의 권선과 시주활동도 활발하였다. 한편 조선후기는 화사집단이 형성되기 시작한 시기로 화사들의 집단 형성과 참여 과정을이 시대의 화기를 통해 알 수 있었다. 초기에는 개인적으로 활동하던 작가들이 점차 소규모 집단을이루다가 18세기 전반기로 들어서면서 의겸화파와 같은 대규모 화사집단이 형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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