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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경상대학교 경남문화연구소 南冥學硏究 南冥學硏究 제52호
발행연도
2016.1
수록면
211 - 249 (39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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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9년 慶尙道 三嘉縣 玉溪洞의 在地士族들이 玉溪亭契를 결성하였다. 옥계정계는 玉溪亭이라는 누정을 매개로 문인적 기질을 공유하고, 喪葬禮 때의 상호 부조를 통해 구성원 간의 결속력을 도모하는 일종의 洞契·洞約이었다. 조선후기 동안 玉溪洞에는 慶州崔氏·咸從魚氏·淸州慶氏·恩津宋氏·義 城金氏 등의 여러 재지사족 가문이 세거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옥계동계 운영을 주도함으로써, 향촌사회에서 재지사족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함과 동시에 하층민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활용하였다. 이에 18세기 전반기까지 옥계정계는 계원의 상장례 때, 동리의 하층민을 일꾼으로 징발하여 노동력을 부조하였고, 하층민의 결사체인 香徒 조직을 긴박하였던 것이다. 옥계정계 구성원들은 상호 부조를 위해 곡물을 납부하였는데, 이것은 식리 활동을 통해증식되어 계의 중요한 재정적 기반으로 활용되었다. 이와 같이 옥계정계가동리에서 강력한 권위를 가지고 있을 때에는 재지사족들이 계를 통해 동리하층민의 인적·물적 자원을 징발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후기 사회·경제적 변화와 옥계정계 주도권을 둘러 싼 옥계동재지사족 간의 갈등이 노정되면서, 옥계정계의 권위는 약화되어 갔다. 특히재지사족 간의 갈등은 매우 복잡다기하게 전개되어, 18세기 동안 동일시기에 복수의 座目이 작성되거나, 특정 가문의 계원이 전부 洞案에서 刀割되기도 했으며, 옥계정계에서 이탈하는 가문도 생겼다. 이러한 갈등 속에 옥계정계는 더 이상 동리의 통제 수단이 되지 못하였다. 이에 18세기 후반부터옥계정계의 구성원들은 새로운 운영 방안을 모색해 나갔다. 향촌사회 통제와관련된 사안을 배제한 새로운 절목을 제정하여, 동계 운영의 초점을 구성원간 상호 부조에 국한시켰던 것이다. 이러한 성격 변화는 향촌 내에서 옥계정계의 권위를 약화시키는 조치였지만, 반대로 재지사족 간의 갈등 요인을 해소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또한 이때부터 옥계정계는 성리학적 자치 규범인鄕約을 표방하기 시작하였다. 조선후기 성리학적 생활규범이 일상생활을 지배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향약을 차용해 명분상으로나마 옥계정계 운영에 대한 성리학적 권위를 부여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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