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한국신종교학회 신종교연구 신종교연구 제38권 제38호
발행연도
2018.1
수록면
93 - 125 (33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1910년대 초부터 시작된 차경석의 교단 형성은 뚜렷한 명칭은 없었지만, 차경석의 포교 노력으로 1916년에는 24방주 조직을 만들었고, 1919년 말에는 60방주 조직으로 확대 개편할 정도로 성장했다. 그러나 1910년 한국을 강점한 식민권력은 제도적으로 종교단체의 활동을 통제해 나갔고, 차경석의 활동도 주시하고 있었다. 이에따라 차경석은 1910년대 초부터 은피의 길에 올랐고, 보천교는 3⋅1민족독립운동 이후에도 지속적인 감시 대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천교는 3⋅1독립운동이 발발한 이후 재편된 60방주제 등을 토대로 급성장했고, 많은 교도를 확보하기에 이르렀다. 더욱이 당시 민중들 사이에 새로운 국가건설의 희망과 연결되며 회자되었던갑자년 천자등극설도 보천교의 성장을 돕고 있었다. 이는 간부들이 교세확장을 위해흘린 소문일 가능성, 혹은 보천교에 대해 악의를 가진 이탈자가 낸 소문일 가능성이높지만, 이러한 소문은 새로운 나라 건설이라는 희망을 심어주었고 이는 보천교의교세확대에도 기여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1922년 초에 차경석 교단이 ‘보천교’로 등록되고, 1924년에 들어서면서 보천교 교단은 기로에 서게 된다. 약속되었던 새로운 국가건설이나 천자등극도 당연히이루어지지 않았다.따라서 교도들의 의구심도 증폭되었다. 지식인과 언론은 이 점을놓치지 않고 보천교를 미신⋅사교로 몰고 있었고 교단 내부에서도 혁신운동이 일어나는 등 보천교는 안팎으로 곤경에 처했다. 다양한 활로들이 모색되었고 그에 따른 고충들이 나타났다. 결과적으로 본다면 어긋난 선택들이 나타났고, 이러한 선택은이후 보천교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가 만들어지면서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외부적으로는 보천교 박멸운동이 일어났으며 내부적으로는 혁신운동이 발생하여 교단이양분되면서, 결국 보천교 교단은 1925년을 지나면서 교세가 쇠락하기 시작했다.

목차

등록된 정보가 없습니다.

참고문헌 (51)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