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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한국신종교학회 신종교연구 신종교연구 제35권 제35호
발행연도
2016.1
수록면
53 - 82 (3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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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차경석과 보천교 교단의 민족주의적 성격을 일제 식민권력의 기록물들을중심으로 고찰하여 보았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여 국운이 기울어버린 상황에서종교 더욱이 민족종교 창교주의 운명은 순탄할 수만은 없었다. 차경석은 교명도 내걸지 못한 채 창교의 초기부터 민족의식과 민족사상, 민족운동 등을 예의 주시하는일제의 끊임없는 감시를 받았고, 뒤에는 혹심한 탄압(취체)을 피해 수년간 은피의길에 나서기도 했다. 보천교는 3⋅1운동 이후 민족독립운동에도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교단 내부에서 고민과 간부들의 협의를 거쳐 상해 임시정부와 만주지역의 독립운동 단체와 연결되어 군자금을 지원하는 등 나름대로 최선의 역할을 했던 것이다. 특히 북만주 지역에 김좌진 등을 중심으로 세워진 신민부에 군자금을 제공하여 별동대를 구성, 일제에 저항케 했는가 하면 남만주를 중심으로 세워진 정의부에도 자금을 제공하여 민족사업을 영위하면서 포교는 물론 독립운동의 토대를 마련하려 구체적으로 계획, 실행에 옮기려 하던 중 검거되기도 했다. 이러한 사실들은대교단을 형성하고 있었던 보천교 역시 식민지 상황이라는 시대적 상황을 자각하고민족적 사명을 망각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자료들이다. 해방 이후 근년까지도 차경석과 보천교는 긍정적 이미지를 확보하지 못하고 유사종교, 사이비종교의 대명사로치부되어 왔고 그런 과정에서 보천교의 민족주의적 성격은 왜곡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지극히 종교에 대한 제국주의적 시각이며 일제강점기 형성된 식민주의적 시각이다. 이제 늦었지만 그러한 보천교에 씌워진 제국주의적이고 식민주의적 시각을되돌아볼 때가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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