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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철수 (중원대학교)
저널정보
한국유라시아연구원 유라시아문화 동북아고대역사 제2권
발행연도
2020.2
수록면
169 - 205 (37page)
DOI
10.47527/JNAH.2020.02.2.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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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1910년 한국을 무단으로 강점한 후 세워진 조선총독부가 가장 고심했던 문제가 민족문제였고 이는 종교정책에도 그대로 드러났다. 식민권력은 소위 유사종교 교단이 민족의식, 더 나아가 혁명의식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농후하여 동학혁명이나 3·1민족독립운동과 같은 항일활동을 전개하기 쉬운 단체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이러한 교단들에는 소외되고 억압받던 사람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고, 그 교의에도 이제 곧 후천개벽으로 새로운 시대가 열리게 되고 그 때가 되면 한민족이 중심민족이 될 것이라는 내용이 내포되어 있었다. 곧 민족종교들은 한민족의 자존감을 높이고 자주의식을 고취하면서 식민권력이 고심했던 민족문제와 쉽게 연결될 수 있는 교단들이었다. 월곡 차경석의 교단형성은 일제 강점기의 시작과 함께 출발했다. 때문에 차경석의 보천교 교단은 내부적으로 교단형성 초기에 적극적인 포교활동을 전개해 나가면서도 외부적으로는 일제강점으로 촉발된 민족문제도 좌시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보천교는 규모가 커질수록 일제 식민권력으로부터 끊임없는 탄압과 회유공작을 받고 있었고, 당시 언론과 사회도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더욱이 1925년 무렵부터는 사회적으로 반민족적 친일단체로 성토를 받았고 심지어 박멸대상이 되고 있었다. 이러한 이미지는 최근까지도 이어지면서 보천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보천교의 항일활동 규명을 어렵게 해왔다. 곧 드러나지 않고 철저히 ‘숨겨진 역사’일 수밖에 없었다. 3 · 1운동 이후가 되면 보천교의 확장된 양적 · 질적 역량을 바탕으로 보천교의 항일활동도 적극적으로 전개되었다. 木방주 김홍규의 10만원 은닉사건, 전국적인 태을교도 대검거사건, 상해국민대표회의에 보천교 대표 3인을 파견한 사건과 그중 일부가 의열단에 입단해 활동한 일, 보천교 경성진정원의 불온문서 사건, 그리고 정의부와 연결된 사건 등은 보천교의 대표적인 항일활동으로 꼽을 수 있다. 본고는 당시 전개되었으나 알려지지 않고 숨겨졌던 보천교의 항일운동을 전체적으로 살펴보고, 더 나아가 차경석의 항일에 대한 생각과 당시 항일투쟁의 대명사격인 백야 김좌진과 관련된 항일활동을 정리하여 보천교의 功過평가에 조금이나마 보탬을 주고자 하였다.

목차

국문요약
Ⅰ. 머리말
Ⅱ. 보천교의 항일활동들
Ⅲ. 차경석과 김좌진의 숨겨진 항일 구상
Ⅳ.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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